5 해석주의: 해석학의 길
너희 중 지혜로운 자는 이상한 구절들 아래 숨겨진 교리를 깨달아라!
-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해석학'이라는 용어는 17세기에 성서학의 맥락에서 현대적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해석학은 성서 해석의 학문으로, 성서를 해석하는 작업에 임하는 학자들에게 지침을 제공합니다. 성서 본문이 의미하는 바를 실제로 설명하는 것은 '주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모든 주석 활동의 배후에는 복잡한 이론, 원칙, 규칙, 방법들이 존재하며, 이들이 주석 활동의 방식을 규정합니다. 이 복합체가 바로 해석학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넓게 보면, 해석학은 주석에 있어 문법이 언어에 해당하거나 논리가 추론에 해당하는 역할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이후로, 이 단어는 학문의 여러 분야로 확장되었습니다. 해석학은 성서 외의 텍스트뿐만 아니라, 기록되지 않은 원천들—인간의 관행, 사건, 상황 등—에도 적용되었습니다. 이를 '읽어내어' 이해를 도출하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인간 존재 개념에서 언어의 중심성과 일치합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언어적 존재입니다. 언어는 우리가 얽혀 있는 상황, 우리에게 닥친 사건, 우리가 수행하는 관행을 결정적으로 형성하며, 이를 통해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이해를 형성합니다.
5 INTERPRETIVISM: THE WAY OF HERMENEUTICS
Ye that are of good understanding, note the doctrine that is hidden under the veil of the strange verses!
- Dante Alighieri, The Divine Comedy
The term 'hermeneutics' came into modern use in the seventeenth century in the context of biblical studies. Hermeneutics was, and is, the science of biblical interpretation. It provides guidelines for scholars as they engage in the task of interpreting Scripture. The actual explanation of what a biblical text means is known as exegesis. Behind all exegetical activity, governing how it is carried out, lies a complexus of theories, principles, rules, and methods. That complexus came to be known as hermeneutics. In broad terms, it could be said that hermeneutics is to exegesis what grammar is to language or logic is to reasoning.
Since then, the word has migrated into many areas of scholarship. Not only has hermeneutics been brought to bear on texts other than the Scriptures, but it has been brought to bear on unwritten sources also—human practices, human events, human situations—in an attempt to 'read' these in ways that bring understanding. This outcome squares with the centrality of language in any concept of human being. We are essentially languaged beings. Language is pivotal to, and shapes, the situations in which we find ourselves enmeshed, the events that befall us, the practices we carry out and, in and through all this, the understandings we are able to reach.
보다 전통적인 언어에 대한 관점
전통적인 언어관에서는 언어가 우리의 현실 개념을 표현하고 설명하며, 이 개념들은 다시 현실을 재생산하거나 반영한다고 여겼습니다. 중세 철학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사물의 본질적 질서(ordo essendi)는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ordo cogitandi)을 형성하며, 이것은 다시 우리가 말하는 방식(ordo loquendi)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나 철학과 사회과학에서 '언어적 전환'이 일어난 이후, 이 관계는 거의 반대로 전환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말하는 방식, 즉 언어가 우리가 무엇을 보고 어떻게 보는지를 형성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언어에 의해 형성된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현실을 구성합니다. 따라서 ordo loquendi는 ordo cogitandi를 형성하며, 의미 있는 현실에 관해서는 ordo essendi마저도 형성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앞서 언급한 현실—우리의 상황, 사건, 관행 및 의미—은 언어에 의해 구성됩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언어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등장한 해석의 방식들을 이러한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리쾨르(Ricoeur)의 유명한 표현인 “상징은 사유를 불러일으킨다”는 해석학의 기본 전제를 나타냅니다. 즉, 신화, 종교, 예술 및 이데올로기의 상징은 철학적 해석을 통해 밝혀질 수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해석학은 간접적인 의미를 해독하고, 겉으로 드러난 의미 아래에 숨겨진 의미를 드러내는 성찰적 실천으로 정의됩니다. 이 방법은 원래 신학자들이 성스러운 텍스트의 내면적 의미를 탐구하는 데 사용했지만, 현대 사상가들인 딜타이(Dilthey), 하이데거(Heidegger), 가다머(Gadamer), 리쾨르(Ricoeur)에 의해 인간을 언어의 행위자로서 세계에 존재하는 일반적 존재로 포괄하기 위해 급진적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Kearney, 1991, p. 277).
어원적으로 '해석학'(hermeneutics)은 그리스어 Epμr)VEUEI v (hermeneuein)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해석하다' 또는 '이해하다'를 의미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이 단어가 내포한 의미는 '말하기', '설명하기', '번역하기'로, 시간적 또는 공간적으로 낯설거나, 경험 바깥에 있는 것을 다루어 그것을 익숙하고, 현재적이며, 이해 가능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Palmer, 1969, pp. 12-14).
해석학과 신 Hermes(헤르메스) 사이에는 명백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헤르메스는 날개 달린 발로 신속히 움직이는 신의 전령으로, 지식과 이해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그의 임무는 인간에게 신의 결정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hermeneuein이 헤르메스에서 파생된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An older, more traditional view of language
An older, more traditional view of language has it representing and articulating our concepts of reality, which in their turn reproduce or reflect reality. As the medieval philosophers would have it, the way things are (ordo essendi) shapes the way we perceive things (ordo cogitandi), and this gets expressed in the way we speak (ordo loquendi). Especially since the 'linguistic turn' in philosophy and social science, this has been more or less reversed. It is now language, the way we speak, that is considered to shape what things we see and how we see them, and it is these things shaped for us by language that constitute reality for us. Thus, the ordo loquendi constitutes the ordo cogitandi and, as far as meaningful reality is concerned, even the ordo essendi.
Looked at in this light, the realities we have referred to above—our situations, events, practices and meanings—are constituted by language. To bring to bear upon them forms of interpretation that emerged in the first instance as ways of understanding language is not so peculiar after all. Ricoeur's famous phrase 'the symbol gives rise to thought' expresses the basic premise of hermeneutics: that the symbols of myth, religion, art and ideology all carry messages which may be uncovered by philosophical interpretation.
Hermeneutics is defined accordingly as a method for deciphering indirect meaning, a reflective practice of unmasking hidden meanings beneath apparent ones. While this method had originally been used by theologians to investigate the inner meanings of sacred texts, it was radically redeployed by modern thinkers like Dilthey, Heidegger, Gadamer and Ricoeur to embrace man's general being in the world as an agent of language (Kearney 1991, p. 277).
Etymologically 'hermeneutics' derives from the Greek word Epμr)VEUEI v (hermeneuein), which means 'to interpret' or 'to understand'. Underpinning this meaning in ancient Greek usage are the notions of 'saying', 'explaining' and 'translating', which already suggests the idea of addressing something that is in some way strange, separated in time or place, or outside of one's experience, with the purpose of rendering it familiar, present and intelligible (Palmer 1969, pp. 12-14).
There is an obvious link between hermeneuein and the god Hermes. Hermes is the fleet-footed divine messenger (he has wings on his feet!). As a messenger, he is bearer of knowledge and understanding. His task is to explain to humans the decisions of the gods. Whether hermeneuein derives from Hermes or the other way round is not certain.
역사적 기원
'해석학'이라는 단어는 약 250년 전에 등장했지만, 해석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은 고대 그리스의 문학 연구와 유대-기독교 전통의 성서 주석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전통
그리스인들은 텍스트를 단순히 무질서하게 배치된 부분들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특정 텍스트와 특정 작가나 학파의 글 전반에서 문법, 스타일, 심지어 아이디어까지도 일관성을 기대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그들은 문법과 스타일의 원칙을 체계화하고, 특정 작가와 학파의 논리를 식별했습니다. 이러한 원칙과 강조점들은 그리스인들이 특정 구절이나 전체 텍스트를 교정하고, 확인하며,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데 사용한 것으로, 비록 '해석학'이라는 용어가 약 2000년 후에 등장했지만, 이들이 이미 해석학적 접근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어와는 별개로, 고대 그리스의 해석적 관행에서 볼 수 있는 '부분과 전체의 관계'는 해석학의 지속적인 주제가 되었습니다.
유대교 전통
다른 전통은 유대교의 해석적 관행에서 기원합니다. 랍비 유대교는 성서를 해석할 때 서사적 텍스트와 법률적 텍스트를 다루는 별도의 절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 하가다(Haggadah, '이야기'): 서사로부터 도덕적 교훈을 이끌어내기 위한 해석 방식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해석 장치가 사용되었는데, 일부는 별개의 텍스트를 연결시키는 데 사용되었고, 다른 일부는 기존 서사 텍스트를 창의적으로 확장하거나 새로운 일화를 추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 할라카(Halakhah, '절차'): 법률적 텍스트를 읽는 방식으로, 자체적인 해석 장치가 있었습니다. 텍스트는 신성한 행동 규범으로 간주되었으며, 이러한 장치를 통해 더 깊은 의미를 발굴할 수 있었습니다.
- 때로는 하가다와 할라카가 결합되어 **타르굼(Targum, '번역')**이라는 형태의 문학을 이루었으며, 이는 자체적으로 해석 원칙을 필요로 했습니다.
초기 기독교 전통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의 해석 방식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2세기에 중요한 발전이 있었습니다. 필로 유대우스(Philo Judaeus)의 저술에서 영향을 받은 이 접근법은 유대교에서 기원한 방식과 그리스 전통에서 비롯된 또 다른 방식을 결합했습니다. 필로에 따르면, 해석자는 텍스트에서 영적인 의미를 찾아야 하지만, 이 영적인 의미는 텍스트가 담고 있는 문자적 의미에 기초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HISTORICAL ORIGINS
While the word is only about two-and-a-half centuries old, hermeneutics as a disciplined approach to interpretation can be traced back to the ancient Greeks studying literature and to biblical exegesis in the Judea-Christian tradition.
Ancient Greek Tradition
The Greeks took texts to be wholes rather than merely a juxtaposition of unorganised parts. Because of this, they expected that grammar and style, and even ideas, would be consistent in any particular text and throughout the writings of any one author or school. On this basis, they proceeded to codify principles of grammar and style and to identify the logic found in particular authors and schools. These principles and emphases, which the Greeks used to correct, confirm or authenticate various passages and even whole texts, can be said to constitute their hermeneutics, even if the word itself was not to emerge for some 2000 years. Whatever of the word, the relating of part to whole and whole to part discernible in the interpretative practices of the ancient Greeks would become an enduring theme within hermeneutics.
Jewish Tradition
Another tradition stemmed from Jewish hermeneutical practices. In interpreting its sacred Scriptures, Rabbinic Judaism had different procedures for dealing with narrative texts and legal texts.
- Haggadah ('story') sought to draw moral lessons from narratives. Here a number of hermeneutical devices were employed. Some of these made it possible to bring separate texts together. Others either creatively embellished the existing narrative text or added anecdotes to it.
- Halakhah ('procedure') was the way in which legal texts were read. This had its own hermeneutical devices. The text was regarded as a divine code of behaviour and the devices enabled it to be mined for deeper significances.
Sometimes haggadah and halakhah were combined in a form of literature known as targum ('translation'), which itself required hermeneutical principles for its interpretation.
Early Christian Tradition
The first Christians inherited Jewish ways of interpreting. However, a significant development occurred in the second century. Drawing on the writings of Philo Judaeus, this move combined the approach deriving from Judaism with another approach that found its source in Greek practice. According to Philo, while interpreters are to look for a spiritual sense in the text, they must find a basis for this spiritual sense in the literal sense that the text bears.
필로의 해석학적 사상과 그 영향
필로(Philo)의 해석학적 사상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이후 두 개의 상반된 학파가 형성되었고, 이들은 심각한 논쟁에 빠졌습니다.
- 알렉산드리아 학파: 오리겐(Origen)이 이끈 이 학파는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 안티오키아 학파: 이 학파는 안티오키아를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주요 대표자는 모프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Theodore of Mopsuestia)였습니다.
두 학파는 텍스트에 문자적 의미와 영적 의미라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는 점에 동의했지만,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영적 의미를 훨씬 더 강조했습니다.
-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텍스트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며 도덕적이면서 신비적인 의미를 도출하려 했습니다.
- 반면, 안티오키아 학파는 텍스트의 문자적 의미를 더 중시하며, 저자의 의도와 문법적으로 쓰인 단어들이 전달하는 의미에 주목했습니다.
이러한 해석학적 접근 방식의 차이는 신학적 견해에서도 상당한 차이를 초래했습니다.
-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예수를 신적인 존재로 보고 인간의 형체를 취한 존재로 이해했습니다.
- 안티오키아 학파는 예수를 인간으로 보고 신적인 지위로 상승한 존재로 이해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는 플라톤적 관점에서 진정한 이해를 '영원한 이성(eternal reasons)'이라는 개념에 두었습니다.
- 이 '영원한 이성'은 본질적으로 신성한 것이지만, 자연과 텍스트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종교 텍스트 해석에서 영적 의미에 우선권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해석학에 대한 교회의 개입
영적 의미를 중시한 이러한 관점은 문자적 의미와는 거의 관련 없는 해석이 대량으로 생겨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교회는 성경 해석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 성경 텍스트의 진정한 의미를 discern하기 위해서는 지도가 필요하다는 점이 받아들여졌습니다.
- 해석의 과제에는 특정한 가정이 필요하며, 이러한 가정은 텍스트 자체가 아닌 종교적 전통에서 비롯됩니다.
전통의 중요성
전통은 가톨릭 신학에서 중심적인 개념입니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Vatican II) 이후의 현대 가톨릭 신학은 성경과 전통을 통합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초기에는 이 두 가지가 신앙의 쌍둥이 원천으로 분리되어 다루어졌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 전통은 가톨릭의 성경 해석에 항상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개신교 종교 개혁의 관점
개신교 종교 개혁(Protestant Reformation)은 '오직 성경(Scripture alone)'을 강조하며, 성경의 데이터를 오늘날의 상황에 적용하려는 해석적 실천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는 성경을 역사적 전통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읽으려는 접근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현대 해석학에 남긴 유산
전통을 돌아보는 관점과 현대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관점 모두 철학과 인간 과학에서 오늘날 우리가 발견하는 해석학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Philo's Thought and Its Influence
Philo's thought on the matter was very influential. Two conflicting schools developed, however, and became locked in bitter controversy.
- The Alexandrian School: Headed by Origen, it was centred at Alexandria.
- The Antiochene School: This school was centred at Antioch and found its main representative in Theodore of Mopsuestia.
Both schools accepted the twofold sense in texts—a literal meaning and a spiritual meaning—but differed in emphasis.
- The Alexandrian School emphasised the spiritual meaning, interpreting texts allegorically to draw moral and mystical meanings.
- The Antiochene School prioritised the literal meaning, focusing on the author's intent and the grammatical content of the written words.
These differing hermeneutical approaches led to significantly different theologies:
- Alexandria viewed Jesus as a divine being who took on human form.
- Antioch viewed Jesus as a human elevated to divine status.
St. Augustine's Perspective
St. Augustine, in a Platonic mode, situated true understanding in what he termed 'eternal reasons.'
- These reasons are essentially divine but discernible in nature and texts.
- Augustine argued for the primacy of the spiritual sense in interpreting religious texts.
Church's Intervention in Hermeneutics
The privileging of the spiritual sense led to a proliferation of interpretations unrelated to the literal meaning of texts. In response, the Church exercised stronger control over scriptural interpretation.
- It became accepted that discerning the true meaning of sacred texts required guidance.
- Interpretation depended on assumptions rooted not in the text itself but in religious tradition.
The Role of Tradition
Tradition is a pivotal notion within Catholicism.
- Although contemporary Catholic theology, following Vatican II, tends to merge Scripture and Tradition, earlier views treated them as twin sources of faith.
- Nonetheless, faith tradition has always decisively shaped biblical interpretation for Catholics.
Protestant Reformation's View
The Protestant Reformation, with its emphasis on 'Scripture alone,' fostered interpretative practices aimed at applying biblical data to contemporary situations, rather than aligning with historical traditions.
Legacy in Modern Hermeneutics
Both orientations—looking back to tradition and looking outward to the contemporary world—resonate in the hermeneutics found today within philosophy and the human sciences.
해석적 이해 방식
해석학적 이론이 의미와 이해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른 접근법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먼저, 해석학은 어떤 방식으로든 텍스트를 낯설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소외나 '거리감(distantiation)' 때문에 해석 작업이 문제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혹은 먼 텍스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아이러니하게도 해석학은 텍스트와 독자 간의 어떤 형태의 친밀감, 즉 해석이 이루어질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는 공통점을 가정한다. 텍스트는 단순히 골동품이나 외국의 호기심 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한 개인이나 공동체에서 다른 개인이나 공동체로 의미, 경험, 신념, 가치를 전달하는 매개체이다. 해석학은 이러한 두 요소 사이의 연결이 작업을 가능하게 만든다고 가정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해석을 이해하면 즉각적인 함의가 따른다. 먼저, 해석학은 텍스트의 의미를 단순히 언어적(significant) 중요성 이상의 것으로 간주한다. 예를 들어, 저자의 의도와 역사, 저자와 해석자 간의 관계, 혹은 독자에게 텍스트가 갖는 특정한 관련성과 같은 요소들이 고려된다.
둘째로, 해석학이 공동체나 개인 간의 의미 공유라고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학문적 연습 이상의 것임을 이미 나타낸다. 이것은 실질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해석학의 기원을 보면, 종교적 해석학은 항상 텍스트의 의미와 의도를 식별하려는 체계적인 시도일 뿐만 아니라, 텍스트를 어떻게 그리고 왜 적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탐구의 형태였다. 오랜 전통을 가진 법적 해석학에서도 마찬가지다. 현대 해석학에서도 의미의 결정은 단순한 추상적 이론화가 아니라 실질적인 판단과 상식의 문제이다.
더 나아가, 해석학을 공동체나 개인 간의 의미 공유로 보는 것은 해석학을 역사와 문화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해석한다"라는 말은 흔한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나 해석학, 즉 비판적 해석 이론은 마르크스주의나 이른바 현상의 과학(현상학)에서도 나타나긴 하지만, 서구 사상에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유일한 흐름이다.
해석학을 통해 해석은 우리의 문화적 자기 이해의 일부가 되었으며, 우리는 역사적이고 문화적으로 특정된 존재로서만 타인 및 일반적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는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 (Rundell 1995, p. 10)
THE HERMENEUTIC MODE OF UNDERSTANDING
What, one might ask, are the characteristic ways in which hermeneutic theories differ from other approaches to meaning and understanding?
For a start, it can be said that, in one way or another, hermeneutics views texts as strange and far off. It is because of this alienation or 'distantiation' that the interpretative task is deemed to be problematic. Even so, talk of alien or distant texts needs to be tempered since, paradoxically, hermeneutics also assumes an affinity of some kind between text and reader-a commonality that provides a basis for the interpretation that is to emerge. Texts are not just antique or foreign curiosities. They are means of transmitting meaning-experience, beliefs, values-from one person or community to another. Hermeneutics assumes a link between the two that makes the exercise feasible.
Understanding interpretation in this fashion has immediate implications. For a start, hermeneutics obviously grounds the meaning of texts in more than their sheerly semantic significance. Account tends to be taken, for example, of features such as the intentions and histories of authors, the relationship between author and interpreter, or the particular relevance of texts for readers.
Secondly, to emphasise that hermeneutics is a sharing of meaning between communities or persons is already to indicate that it is no mere academic exercise. It has practical purposes in view. The origins of hermeneutics already suggest this, for religious hermeneutics has always been more than just a disciplined attempt to identify textual meaning and intent; it is very much a form of inquiry into how texts can and should be applied. The same is true of the long tradition of legal hermeneutics. It is equally true of modern hermeneutics: determination of meaning is a matter of practical judgment and common sense, not just abstract theorising.
Even more importantly, to see hermeneutics as a sharing of meaning between communities or individuals is to situate hermeneutics within history and within culture. It has now become a commonplace to say that 'we all interpret'. However, hermeneutics-the critical theory of interpretation-is the only current in western thought that has made this issue its own, notwithstanding its presence in both Marxism and that so-called science of phenomena, phenomenology. Through hermeneutics, interpretation has become part of our cultural self-understanding that only as historically and culturally located beings can we articulate ourselves in relation to others and the world in general. (Rundell 1995, p. 10)
해석학 이론에 포함된 주요 개념들
많은 해석학 이론에서, 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저자의 본래 이해보다 더 깊거나 더 확장될 수 있다는 전망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목표는 저자 자신의 의미와 의도가 대체로 암묵적으로 남아있으며, 저자 자신도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관점에서 비롯된다. 텍스트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들이 당연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숙련된 해석학적 탐구는 이러한 의미와 의도를, 즉 텍스트에 숨겨진 것을 밝혀낼 잠재력을 가진다. 해석자는 결국 저자 스스로 명확히 표현할 수 없었던 의미, 특히 전제에 대해 명시적인 인식을 가지게 될 수 있다.
해석학 문헌에서 더욱 일관되게 등장하는 주제는 '해석학적 순환'이라는 개념이다. 해석학적 순환의 한 형태는 어떤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이해하려는 기본적인 이해를 전제로 하는 아이디어와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해는 이미 이해된 것에서 출발하여 점진적으로 발전하며, 더 발전된 이해는 시작점을 비추고 확장하는 데 기여한다.
해석학적 순환을 개념화하는 또 다른 방법은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 부분을 파악하고, 부분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전체를 통찰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전체 텍스트의 의미나 어떤 사회의 의미 구조에 대한 우리의 지식 주장은 개별 문장이나 행위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제공하는 증거로 뒷받침된다. 반대로, 그러한 개별 요소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지식 주장은 전체 구조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지식으로 뒷받침되고 정당화된다. 이것이 19세기에 발전된 고전적 형태의 해석학적 순환이다. (Okrent 1988, p. 161)
이러한 전체에 대한 관심은 특히 인간 과학의 특징으로 간주되어 왔다. 자연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들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인간 과학의 경우, 이는 충분하지 않다. 인간 활동에 관한 텍스트나 인간 삶을 안내하는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석학적 순환의 방식으로 부분과 전체 사이를 변증법적으로 오갈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가 이미 논의했던 주장(그리고 의문을 제기했던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되었다. 즉, 인간 과학과 자연 과학은 전혀 다른 연구 대상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 과학에서 사용되는 이해(Verstehen)는 자연 과학에서는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4장에서 해석주의를 다룰 때, 우리는 이 주장이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에 의해 제시되었음을 확인했다.
Included in much hermeneutic theory is the prospect of gaining an understanding of the text that is deeper or goes further than the author's own understanding.
This aim derives from the view that in large measure authors' meanings and intentions remain implicit and go unrecognised by the authors themselves. Because in the writing of the text so much is simply taken for granted, skilled hermeneutic inquiry has the potential to uncover meanings and intentions that are, in this sense, hidden in the text. Interpreters may end up with an explicit awareness of meanings, and especially assumptions, that the authors themselves would have been unable to articulate.
An even more consistent theme in the literature of hermeneutics is the notion of the 'hermeneutic circle'. One form in which the hermeneutic circle is encountered is the claim that, in order to understand something, one needs to begin with ideas, and to use terms, that presuppose a rudimentary understanding of what one is trying to understand. Understanding turns out to be a development of what is already understood, with the more developed understanding returning to illuminate and enlarge one's starting point.
Another way to conceptualise the hermeneutic circle is to talk of understanding the whole through grasping its parts, and comprehending the meaning of parts through divining the whole. Our knowledge claims in regard to the meaning of a whole text or of the meaning structure of some society will be supported by evidence supplied by our knowledge of the meaning of particular sentences or acts. On the other hand, our knowledge claims in regard to the meanings of those individual elements will be supported by and justified in terms of our knowledge of the meaning of the entire structure. This is the classical form of the hermeneutic circle as developed in the nineteenth century. (Okrent 1988, p. 161)
Some have seen this attention to the whole as characteristic of the human sciences in particular. They accept that one can satisfactorily understand the natural world simply by understanding the parts that make it up. In the case of the human sciences, however, this simply will not do. To understand a text bearing upon human affairs or a culture that guides human lives, one needs to be able to move dialectically between part and whole, in the mode of the hermeneutic circle. This has been put forward in support of a claim we have considered already (and called into question)—that the human sciences and the natural sciences have quite different subject matters and that the understanding (Verstehen) exercised in the human sciences is not required in the natural sciences. In dealing with interpretivism in Chapter 4, we found this claim propounded by Wilhelm Dilthey.
현대 해석학
딜타이(Dilthey)는 현대 해석학의 역사에서 중심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그는 현대 해석학의 첫 번째 인물은 아니었다. 19세기 초, 즉 19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와 초반부에는 프리드리히 아스트(Friedrich Ast, 1778–1841)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가 해석학의 영역을 성경 주석을 넘어 확장시켰다. 특히 슐라이어마허는 아스트보다 훨씬 더 인간의 모든 이해를 밝히는 일반 해석학을 개발하려 노력했으며, 특정 텍스트를 해석하기 위한 원리와 규칙만 제공하는 것 이상을 추구했다. 이로 인해 그는 현대 해석학의 창시자로 간주된다.
슐라이어마허: 문법과 심리학
슐라이어마허는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로, 1804년부터 1807년까지 할레(Halle)에서, 그리고 1810년부터 베를린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 텍스트를 읽는 것은 누군가의 말을 듣는 것과 매우 유사한 행위였다. 화자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단어를 사용하며, 청자는 화자가 사용하는 언어를 공유하기 때문에 이를 이해할 수 있다. 청자는 자신이 듣고 있는 단어, 구, 문장을 알고 있으며, 문법적 규칙을 이해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청자는 화자의 입장에 서서 화자가 전달하려는 의도를 인식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화자와 청자 간의 상호작용에는 일종의 공감(empathy)이 존재하며, 슐라이어마허는 이를 텍스트 해석으로 확장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슐라이어마허가 모든 해석학에서 제시한 이중적 차원을 볼 수 있다. 해석학은 문법적 차원과 심리적 차원을 동시에 포함한다.
- 문법적 측면: 텍스트를 문학적 맥락에 위치시키며, 해석을 통해 그 문학적 맥락을 재구성한다.
- 심리적 측면: 해석학자는 저자의 의도뿐만 아니라 저자의 전제까지도 추론하고 명확히 할 수 있다.
MODERN HERMENEUTICS
Dilthey is of central importance in the history of modern hermeneutics. He was not the first modern hermeneuticist, however. Around the turn of the nineteenth century and in the early years of that century, it was Friedrich Ast (1778–1841) and 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 who extended hermeneutics beyond the realm of biblical exegesis. Schleiermacher, much more than Ast, strove to develop a general hermeneutics that would illuminate all human understanding and not just offer principles and rules for interpreting particular texts. He can be seen as the founder of modern hermeneutics.
SCHLEIERMACHER: GRAMMAR AND PSYCHOLOGY
Schleiermacher, a German Protestant theologian, was a professor at Halle from 1804 to 1807 and at Berlin from 1810.
For Schleiermacher, reading a text is very much like listening to someone speak. Speakers use words to express their thoughts and listeners are able to understand because they share the language that a speaker employs. They know the words, phrases, and sentences that they are hearing, and they understand the grammatical rules. On this basis, they are able to put themselves in the place of the speaker and recognise what the speaker is intending to convey. There is place, then, for a kind of empathy in the speaker-listener interchange and Schleiermacher extends this to the interpretation of texts.
Already we can see the twofold dimension that Schleiermacher posits in all hermeneutics. Hermeneutics is at once grammatical and psychological.
- Grammatical aspect: Attention to the grammatical aspect situates the text within its literary context, at the same time reshaping that literary setting by the interpretation it makes of the text.
- Psychological aspect: The hermeneuticist is able to divine and elucidate not only the intentions of the author but even the author's assumptions.
딜타이의 '객관적 정신'
슐라이어마허의 전기 작가인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는 19세기 후반 가장 저명한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베를린 대학에서 오랜 세월 교수로 재직한 그는, 은퇴 후에도 생애 마지막 시기 동안 제자들을 모아 그의 영향력 있는 작업을 지속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평생 강조해 온 이중적인 메시지를 전파했는데, 그것은 바로 삶과 역사, 이 두 가지가 불가분하게 얽혀 있다는 점이었다.
딜타이는 실증주의자들로부터 형이상학을 배제하고, 이전의 모든 철학을 단편적이라고 간주하며, 자신의 철학을 "단편적이지 않은 전체적이고 완전한 경험, 즉 완전하고도 온전한 현실"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Marias, 1967, p. 379). Marias는 딜타이를 인용하며, 딜타이에게 철학은 "실제적인 것, 즉 단편적이지 않은 모든 실제적인 것의 과학"이라고 설명한다(1967, p. 383). 그럼에도 딜타이는 오늘날 우리가 정의하는 의미의 실증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인간의 이해가 결코 현실을 완전히 소진할 수 없으며, 현실에는 언제나 알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는 것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우리는 모두 우리 행동을 인도하는 **Weltanschauung(세계관)**을 가지고 있지만, 이는 지성이 아니라 삶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딜타이가 말하는 삶은 무엇보다도 역사적 삶이다. 딜타이는 그가 "역사적 의식의 상승"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누구보다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세계와 그 안에서의 우리 자신이 가지는 역사적 성격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인간 존재의 본질적으로 역사적인 특성을 딜타이만큼 강력하게 강조한 사람은 거의 없다. 오늘날 인간 및 사회과학에서 발견되는 역사주의는 적지 않은 부분이 딜타이에게 기원을 둔다. 딜타이는 Marias가 "역사적 사건의 독특한 일시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통찰하며, 모든 사람은 역사 속에 살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것도 결정적이지 않다는 점을 깨닫는다. 딜타이는 역사를 "거대한 폐허의 장"이라고 묘사한다(Marias, 1967, p. 380). 가다머(Gadamer)는 "시간의 폐허 속에서 고전을 보존하려는 노력"으로 이를 재구성하려 했지만(1989, p. 289), 딜타이는 그러한 시도를 인정하지 않았다.
딜타이는 삶의 역사적 성격과 과학의 인간성을 강조하며, 이는 그의 관심사가 Geisteswissenschaften(정신과학), 즉 "정신의 과학"에 있음을 보여준다. 딜타이는 자연적 현실과 사회적 현상을 명확히 구분하는데, 이는 자연에서 관찰되는 현상과 달리, 사회적 현상은 인간 의식의 주관성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각기 다른 현상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론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인간 및 사회과학의 분야에서도 딜타이는 여전히 객관적 지식을 추구했다. 그가 목표로 했던 것은, 자연과학의 환원주의와 기계론을 넘어서는 동시에 삶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론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DILTHEY'S 'OBJECTIVE MIND'
Schleiermacher's biographer, Wilhelm Dilthey, is hailed as one of the most eminent philosophers of the late nineteenth century. For many years a professor at the University of Berlin, he continued his influential work after his retirement by gathering disciples around him in the final years of his life. What he emphasised to these followers was the twofold message he had preached throughout his teaching years: life and history, both inextricably intertwined.
From the positivists Dilthey had learned to eschew metaphysics, to regard all previous philosophy as partial only, and to base his own philosophy "on total, full experience, without truncations: therefore, on entire and complete reality" (in Marias 1967, p. 379). In citing Dilthey to this effect, Marias tells us that, for Dilthey, philosophy "is the science of the real; that is, of all the real without truncations" (1967, p. 383). For all that, Dilthey is no positivist, at least not in the sense in which positivism has come to be defined in our time. He believes firmly that human understanding can never exhaust the real and that in the real there will always remain something unknowable and ineffable. To be sure, we all have a Weltanschauung, a worldview that guides our actions; however, this is grounded not in the intellect but in life.
The life Dilthey is referring to is, above all and before all, historical life. Dilthey is most aware of what he calls the rise of historical consciousness. He never loses sight of the historical character of the world and of ourselves within the world. Few have stressed the essentially historical character of human existence as forcefully as he does. The historicism we find today in so much of human and social science stems in no small measure from Dilthey. With the keenest of insights, he recognises what Marias calls "the peculiar ephemerality of the historical event"—that all people live within history and nothing, therefore, is definitive. History, Dilthey tells us, is "an immense field of ruins" (in Marias 1967, p. 380). Gadamer, as we shall see, wants to reclaim the classical as "preservation amid the ruins of time" (1989, p. 289). Dilthey will have none of that.
Dilthey's emphasis on the historical character of life and the humanness of science (his interest is in the Geisteswissenschaften—the "sciences of the spirit") leads him, as we have seen already, to distinguish sharply between natural reality and social phenomena. Unlike the phenomena encountered in nature, social phenomena are seen to stem from the subjectivity of human consciousness. Accordingly, Dilthey believes, study of the one and of the other calls for different methods.
Even in the field of human and social science, however, he continues to seek objective knowledge. What he wants to elaborate is a methodology for gaining objective knowledge that escapes the reductionism and mechanism of natural science and remedies its failure to take account of the historical embeddedness of life.
딜타이: 보편적 정신적 형식과 해석학적 이해
딜타이에게는 사회적 경험에서 마주하는 특정 사건들을 형성하는 보편적 정신적 형식이 존재한다. 인간이 쓰는 텍스트, 말하는 언어, 창작하는 예술, 그리고 수행하는 행동은 모두 의미의 표현이다. 이러한 의미를 탐구하는 것은 물리학이나 화학과 같은 자연과학 실험을 통해 현실을 탐구하는 것과는 다르며, 오히려 담론이나 시를 해석하는 것과 더 유사하다. 과학적 실험은 **알고 설명하는 것(Erkennen 혹은 Erklären)**을 추구하지만, 인간 활동에 대한 탐구는 **이해(Verstehen)**를 추구한다. 이 구분은 흔히 막스 베버(Max Weber)에게 귀속되지만, 그것이 정당한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만약 이 구분이 사용된다면, 여러 중요한 조건을 추가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폴 리쾨르(Paul Ricoeur)는 딜타이의 이분법을 대체하기 위해 **변증법적 통합(dialectical form of integration)**을 제안했다. 리쾨르는 존재론적 이해에서 설명으로, 그리고 다시 설명에서 존재론적 이해로 이동하는 '해석학적 아치(hermeneutical arc)' 개념을 제시한다(Ricoeur, 1976, p. 87).
초기 딜타이: 공감에서 역사주의로
초기 딜타이는 슐라이어마허와 마찬가지로 공감(empathy) 개념을 사용했다. 물론 시대와 문화에 따라 사람들의 관점, 신념, 가치가 다르지만, 딜타이는 초기에는 모든 인간이 같은 인간 존재로서 과거나 다른 장소에서 일어난 일을 이해하고, 어쩌면 그것을 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 가정은 많은 비판을 받았고, 딜타이는 이러한 비판을 수용하며 자신의 관점을 수정했다. 이후 그는 훨씬 더 역사주의적 입장을 채택하여, 사람들의 언어, 글, 예술, 행동이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저자의 역사적 세계관은 그들의 창작물을 제한하며, 해석학적 탐구에서 이를 배제할 수 없다.
딜타이의 '객관적 정신'
딜타이는 결국 저자의 역사적·사회적 맥락이 이해의 주요 근원임을 인정하게 된다. 인간의 맥락은 인간 의식의 객관화(objectification) 또는 외화(externalisation), 즉 딜타이가 **'표현(Ausdruck)'**이라 부르는 것이다. 딜타이는 이를 **'객관적 정신(objective mind)'**이라고 부르며, 이는 그의 해석학 접근 방식을 변형시켰다. 딜타이는 지금까지의 심리학적 초점에서 벗어나 훨씬 더 사회학적 탐구로 이동했다. 공감은 문화적 분석으로 대체되었으며, 딜타이는 개인에 대한 동일시에서 벗어나 사회적으로 파생된 의미 체계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딜타이는 여전히 인간의 **'삶의 경험(Erlebnis)'**을 추적하며, 이제 그러한 경험이 언어, 문학, 행동, 예술, 종교, 법률 등 모든 문화적 제도와 구조 속에 구현된다는 점을 받아들였다.
해석학적 이해와 해석학적 순환
삶의 이러한 객관화, 외화 또는 표현에 대한 해석학적 이해를 얻으려면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c circle)**이 필요하다. 해석자는 텍스트에서 시작하여 저자의 역사적·사회적 환경으로 이동하며, 텍스트가 만들어진 세계를 재구성하고 그 안에서 텍스트를 위치시킨 다음 다시 텍스트로 돌아간다.
객관적 지식과 해석자의 역할
딜타이는 모든 인간 이해에서 해석자의 삶의 경험이 중요하다고 보면서도 인간 세계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추구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지식의 객관성은 물리학이나 화학과 같은 과학에서 주장되는 객관성과 다르다. 그럼에도 딜타이는 저자와 저자의 세계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고, 해석자의 신념과 가치가 덜 작용하게 될수록 객관성과 타당성은 점차적으로 달성될 수 있다고 믿었다.
Original Text
For Dilthey, there are universal spiritual forms shaping the particular events one encounters in social experience.
The texts humans write, the speech they utter, the art they create, and the actions they perform are all expressions of meaning. Inquiring into that meaning is much more like interpreting a discourse or a poem than investigating a matter of natural reality through an experiment in, say, physics or chemistry. Scientific experiments seek to know and explain (Erkennen or Erklären). Inquiry into human affairs seeks to understand (Verstehen). This distinction, as we have seen earlier, is often attributed to Weber. Whether that can justly be done at all is a moot point. If it is done, it calls at the very least for a number of important qualifications. We should also note Paul Ricoeur's spirited attempt to supplant Dilthey's dichotomy with a dialectical form of integration. Ricoeur (1976, p. 87) offers the notion of a 'hermeneutical arc' that moves from existential understanding to explanation and from explanation to existential understanding.
The early Dilthey invoked the notion of empathy as Schleiermacher had done.
True enough, people's perspectives, beliefs, and values differ from age to age and culture to culture. Still, Dilthey felt at this time, we are all human beings and therefore able to understand—and, as it were, relive—what has happened in the past or in another place. This assumption on Dilthey's part came under heavy fire at the time, and he revised his views in the light of the criticism he was receiving. We find him adopting a far more historicist position, accepting that people's speech, writings, art, and behaviour are very much the product of their times. The historically derived worldview of authors constrains what they are able to produce and cannot be discounted in hermeneutical endeavours.
Dilthey comes to acknowledge, in fact, that the author's historical and social context is the prime source of understanding.
The human context is an objectification or externalisation—an 'expression' (Ausdruck), Dilthey also calls it—of human consciousness. He terms this the 'objective mind,' and acknowledging it transforms his approach to hermeneutics. The psychological focus found in his work to date gives way to a much more sociological pursuit. Empathy is replaced by cultural analysis. Dilthey moves from personal identification with individuals to an examination of socially derived systems of meaning. On the track of people's 'lived experience' (Erlebnis) as fiercely as ever, he now accepts that their lived experience is incarnate in language, literature, behaviour, art, religion, law—in short, in their every cultural institution and structure.
Gaining hermeneutical understanding of these objectifications, externalisations, or expressions of life involves a hermeneutic circle.
The interpreter moves from the text to the historical and social circumstances of the author, attempting to reconstruct the world in which the text came to be and to situate the text within it—and back again.
In according a place in hermeneutics, as in all human understanding, to the interpreter's lived experience, Dilthey has not abandoned his quest for an objective knowledge of the human world.
True, the objectivity of this kind of knowledge will always differ from the scientific objectivity claimed, say, in the findings of physics and chemistry. Nevertheless, Dilthey believes, objectivity and validity can be increasingly achieved as more comes to be learned about the author and the author's world, and as the interpreter's own beliefs and values are given less play.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해석학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현상학적 해석학은,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해석학적 현상학으로 볼 수 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Being and Time)》(1962)에서는 현상학적 차원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해석학은 **'현상학적 보는 것(phenomenological seeing)'**의 계시적 측면으로, 이를 통해 존재론적 구조와 궁극적으로 존재(Being) 자체가 드러난다.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해석학은 나의 신학적 연구로부터 이미 친숙한 것이었다." (1971, pp. 10–11)
그러나 하이데거는 전형적으로 익숙한 단어를 새롭게 정의한다. 그의 작업에서 해석학은 그가 추구하는 현상학적 프로젝트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변모한다.
"현상학적 기술의 의미는 방법으로서 해석에 있다. 존재론적 현상학의 '로고스(λόγος)'는 에르메뉴에인(ἑρμηνεύειν, 해석하다)의 성격을 가진다... 철학은 보편적 현상학적 존재론이며, 이는 존재의 해석학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해석학은 존재 분석으로서 모든 철학적 탐구의 길잡이를 설정하고, 철학적 탐구가 발생하는 지점으로부터 그것이 돌아가는 지점까지 이끈다." (Heidegger, 1962, pp. 61–62)
존재론에 대한 하이데거의 평생의 초점
위 인용문은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핵심을 이루는 존재론(ontology), 즉 존재에 대한 연구를 반영한다. 하이데거에게 철학은 곧 존재론이다.
그의 존재론에 대한 관심은 1907년, 그가 프란츠 브렌타노(Franz Brentano)의 박사 논문을 읽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이 논문의 제목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른 존재의 다의적 의미(On the Manifold Meanings of Being in Aristotle)》**였다.
당시 18세였던 하이데거는 이 논문에 매료되어 존재의 의미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를 시작하게 된다.
현상학: 존재론으로 가는 유일한 길
하이데거는 현상학을 존재론으로 들어가는 방법으로 채택한다. 그의 관점에서, 존재론으로 접근하는 다른 길은 없다.
하이데거에게 철학이 존재론이라면, 존재론은 현상학이다.
"현상학은 존재론의 주제가 될 대상에 접근하는 우리의 방식이며, 이를 논증적으로 명확히 하는 우리의 방법이다. 현상학으로서만 존재론이 가능하다." (Heidegger, 1962, p. 60)
요약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현상학은 존재와 시간이라는 철학적 작업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 해석학은 존재론적 구조와 존재 자체를 드러내는 도구로 기능한다.
- 철학은 보편적 존재론이자 현상학으로, 인간 존재(Dasein)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한다.
- 하이데거에게 있어 존재론은 현상학을 통해서만 접근 가능하며, 이는 그의 존재 탐구의 기초를 형성한다.
Original Text
HEIDEGGER'S PHENOMENOLOGICAL HERMENEUTICS
The phenomenological hermeneutics of Martin Heidegger can, with even greater validity, be seen as a hermeneutical phenomenology. It is clearly the phenomenological dimension that is to the fore in his Being and Time (1962). For Heidegger, hermeneutics is the revelatory aspect of 'phenomenological seeing' whereby existential structures and then Being itself come into view.
Hermeneutics, Heidegger tells us, 'was familiar to me from my theological studies' (1971, pp. 10–11). Characteristically, Heidegger takes this word and gives it fresh meaning. In his hands it comes to represent the phenomenological project he has embarked upon.
". . . the meaning of phenomenological description as a method lies in interpretation. The logos of the phenomenology of Dasein has the character of a hermeneuein... Philosophy is universal phenomenological ontology, and takes its departure from the hermeneutic of Dasein, which, as an analytic of existence has made fast the guiding-line for all philosophical inquiry at the point where it arises and to which it returns." (Heidegger 1962, pp. 61–62)
This passage reflects Heidegger's lifetime focus on ontology, the study of being. For him, philosophy is ontology. Heidegger's interest in ontology began as early as 1907 when he was given a doctoral dissertation to peruse. The dissertation, written by Franz Brentano, was entitled Von der mannigfachen Bedeutung des Seienden nach Aristoteles ("On the Manifold Meanings of Being in Aristotle"). This volume caught the imagination of the eighteen-year-old Heidegger and launched him on a never-ending search for the meaning of being.
The passage just cited also reflects Heidegger's adoption of phenomenology as the way into ontology. There is, as he sees it, no other way. If, for Heidegger, philosophy is ontology, ontology, by the same token, is phenomenology.
"Phenomenology is our way of access to what is to be the theme of ontology, and it is our way of giving it demonstrative precision. Only as phenomenology is ontology possible." (Heidegger 1962, p. 60)
우리의 논의에서 이미 다룬 현상학에 대해 상기해봅시다. 현상학은 의식의 원초적인 내용으로 돌아가려는 시도입니다. 즉, 우리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전에 우리의 경험 속에서 그 자체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대상들로 돌아가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대상들에 대해 이미 어떤 의미가 부여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문화는 이러한 대상들에 대해 미리 만들어진 이해를 제공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능한 한 그러한 이해를 옆으로 치워야 합니다. 또는 하이데거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존재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다가오며 우리와 함께 작용하고, '배려(concern)'라는 현상뿐만 아니라 그러한 배려 속에서 자체적으로 나타나는 존재 자체를 은폐하는 해석적 경향을 밀어내야 합니다. (Heidegger, 1962, p. 96)
따라서 하이데거는 문화적으로 유래된 의미를 탐구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는 이러한 의미를 '그들(das Man)', 즉 익명의 존재가 제공하는 매혹적이고 독재적인 목소리로 간주하며 이를 강하게 비판합니다(Crotty, 1997). 대신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 또는 그가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인 'Dasein'의 현상학을 탐구합니다.
하이데거의 Dasein 현상학은 그를 존재로 향하는 여정의 출발점으로 이끕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소유하고 있는 존재에 대한 희미한 선이해(pre-understanding)이며, 그는 이를 존재의 '전구조(forestructure)'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선이해에 도달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현상학입니다. 존재 자체의 드러남(manifestation)과 다른 현상들이 존재의 빛 속에서 드러나는 과정은 계속해서 현상학적 과정으로 유지됩니다.
드러남(manifestation)과 드러내기(unveiling)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해석학적 맥락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해석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해석과 묘사라는 개념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존재론과 현상학뿐만 아니라, 변증법적 혹은 수사학적 의미를 지닌 해석학을 통해 언어라는 요소도 통합적으로 연결합니다. Richardson(1963, p. 631)에 따르면, 하이데거에게 해석학과 현상학은 하나가 됩니다. '만약 "해석학"이 고유의 뉘앙스를 유지한다면, 이는 언어라는 함축을 의미합니다.'
Let us recall what we have discussed already regarding phenomenology. It is an attempt to return to the primordial contents of consciousness, that is, to the objects that present themselves in our very experience of them prior to our making any sense of them at all. Sense has been made of them, of course. Our culture gives us a ready-made understanding of them. So we need to lay that understanding aside as best we can. Or, in Heidegger's terms, we must rid ourselves of our tendency to immediately interpret.
The achieving of phenomenological access to the entities which we encounter, consists rather in thrusting aside our interpretative tendencies, which keep thrusting themselves upon us and running along with us, and which conceal not only the phenomenon of such 'concern', but even more those entities themselves as encountered of their own accord in our concern with them. (Heidegger 1962, p. 96)
Heidegger does not embark, therefore, on any exploration of culturally derived meanings. Indeed, he is most dismissive of these meanings as the seductive and dictatorial voice of das Man—the 'they', the anonymous One (Crotty 1997). What Heidegger embarks upon instead is a phenomenology of human being, or Dasein, to use the word that he consistently uses.
Heidegger's phenomenology of Dasein brings him, in the first instance, to his starting point on the journey towards Being, that is, the shadowy pre-understanding of Being that we all possess and which he calls the 'forestructure' of Being. Reaching that pre-understanding is already a phenomenology. Its further unfolding, together with the manifestation of Being itself and the unveiling of other phenomena in the light of Being, remains a phenomenological process throughout.
To talk of manifestation and unveiling is to talk in hermeneutical vein. And to talk of hermeneutics is to invoke the notions of interpretation and description. Heidegger is bringing together in a unitary way not only ontology and phenomenology but, through hermeneutics with its connotations of dialectics or rhetoric, the element of language as well. For Heidegger, Richardson tells us (1963, p. 631), hermeneutics and phenomenology become one: 'If "hermeneutics" retains a nuance of its own, this is the connotation of language'.
따라서 하이데거에게 있어 해석학은 초기의 언어학자들에게 그러했듯이 텍스트를 해석하기 위한 원칙이나 규칙의 체계가 아닙니다. 또한 딜타이(Dilthey)가 이해한 것처럼 인간 과학(human sciences)을 위한 방법론도 아닙니다. 하이데거의 해석학은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현상학적 설명'을 의미합니다(Palmer, 1969, p. 42). 하이데거의 해석학은 우리의 존재로 현상학적으로 돌아가는 것에서 시작하며, 이는 처음에는 모호하고 미발달된 형태로 우리에게 제시됩니다. 이후 이 선이해(pre-understanding)를 펼치고, 암묵적인 것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며, 존재 자체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합니다.
앞서 인용된 한 구절에서, 하이데거는 'Dasein의 해석학'에 대해 이야기하며, 모든 철학적 탐구의 길잡이 원칙을 "그것이 발생하는 지점과 그것으로 돌아가는 지점에" 고정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하이데거는 자신의 해석학적 현상학을 순환적 운동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 존재에 대한 탐구에서 우리는 존재에 대한 선이해로부터 시작합니다.
- 과제는 이러한 초기의 이해를 펼쳐서 처음에는 암묵적이고 주제화되지 않았던 것을 명시적이고 주제화된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 이러한 설명은 먼저 인간 존재와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구조(existentials)'를 파악하는 것으로 이어지며,
- 궁극적으로 존재 자체를 파악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 존재에 대한 이 보다 더 깊이 있는 이해는 다시 세계에서 우리의 존재를 풍부하게 합니다.
하이데거가 여기서 암시하는 것은 그의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c circle)'의 버전입니다(그림 5 참조). 그는 우리가 "원천적이고 완전하게 '순환' 안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1962, p. 363). 이미 살펴본 것처럼 '해석학적 순환'이라는 용어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하이데거는 이 용어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는 "이 이해의 순환은 무작위적인 지식이 이동할 수 있는 궤도가 아니다. 그것은 Dasein 자체의 실존적 전구조를 표현한다"고 말합니다(1962, p. 195).
For Heidegger, therefore, hermeneutics is not a body of principles or rules for interpreting texts, as it was for the earlier philologists. Nor is it a methodology for the human sciences, as Dilthey understood it to be. Heidegger's hermeneutics refers 'to his phenomenological explication of human existing itself' (Palmer 1969, p. 42). Heidegger's hermeneutics starts with a phenomenological return to our being, which presents itself to us initially in a nebulous and undeveloped fashion, and then seeks to unfold that pre-understanding, make explicit what is implicit, and grasp the meaning of Being itself.
In a passage quoted above, Heidegger, in talking of the 'hermeneutic of Dasein', states that it makes fast the guiding-line for all philosophical inquiry 'at the point where it arises and to which it returns'. Here Heidegger is describing his hermeneutical phenomenology as a circular movement. In our quest for Being, we begin with and from a pre-understanding of Being. The task is to unfold this rudimentary understanding and render explicit and thematic what is at first implicit and unthematised. This explication leads us first to a grasping of 'existentials'—structures of being that make human existence and behaviour possible—and on to a grasping of Being itself. This more enlightened understanding of Being then returns to enrich our existence in the world.
What Heidegger is alluding to here is his version of the 'hermeneutic circle' (see Figure 5). We must, he tells us, 'leap into the "circle", primordially and wholly' (1962, p. 363). As we have already seen, the term 'hermeneutic circle' has a long history, but Heidegger fills the term with meaning of his own. 'This circle of understanding', he tells us (1962, p. 195), 'is not an orbit in which any random kind of knowledge may move; it is the expression of the existential forestructure of Dasein itself.'
하이데거는 후기 작품에서 순환의 두 번째 부분에 몰두합니다. 그는 Dasein을 존재(Being)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다루기보다는 존재 자체에 직접적으로 관심을 기울입니다. 존재와 시간에서 나타나는 Dasein의 현상학은 전(前)소크라테스 시대의 그리스 철학자들과 횔덜린(Hölderlin)과 같은 시인들과의 해석학적 대화로 대체됩니다.
하이데거는 초기 그리스 철학의 사상에 독창성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이후에 상실된 방식으로 존재와 접촉하고 있었습니다. 하이데거는 "본래적으로 생각되었던 것을 더 본래적으로 사고하려는 세심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1977, p. 303). 이러한 접근 방식의 전환, 즉 Dasein의 분석에서 초기 그리스 사상가들과의 지속적인 대화로의 전환에서 역사에 대한 새로운 강조가 나타납니다. 일부 평론가들은 존재와 시간이 비역사적(ahistorical)이라고 비판해 왔지만, 후기 작품들에는 이러한 비판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1930년대가 진행되면서 하이데거는 점점 더 '존재의 역사(history of Being)'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는 존재가 역사적 시대 안에서 펼쳐지는 '사건(Ereignis)'에 대해 글을 썼으며, 이는 사유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또한 사유에서 자신을 숨기는 방식으로 존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초기 그리스 사상은 '자체적으로 꽃피우는 출현(self-blossoming emergence)'입니다(Heidegger, 1959, p. 14). 이는 원초적인 사고이며, 그 본래적 성격은 되찾아야 합니다. 서양 문명이 시작될 무렵,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하이데거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본래적으로 개념화된 시작은 존재(Being) 자체이다(Der Anfang – anfänglich begriffen – ist das Seyn selbst)" (1989, p. 58). 따라서 그는 "본래적으로 사고되었던 것을 더 본래적으로 사고하라"고 촉구합니다.
하이데거는 또한 우리에게 시(poetry)에 주목하라고 말하며, "우리의 존재는 본질적으로 시적(poetic)이다"라고 주장합니다(1949, p. 283). 시는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장소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존재가 드러나는 '터(clearance)'를 제공합니다. 사색적 시적 활동은 "사실상 존재의 지형학(topology)"이며, 이는 "존재에게 그것이 실제로 현존하는 위치를 알려준다"고 말합니다(Heidegger, 1975, p. 12). 시의 본질은 "단어를 통해 존재를 확립하는 것"이며(Heidegger, 1949, p. 282), 시인은 "시적 사유를 통해 존재의 기초와 중심에 도달한다"고 설명합니다(Heidegger, 1949, p. 289).
In his later works Heidegger is preoccupied with the second part of the circle. Instead of addressing Dasein as the entrée to Being, he concerns himself directly with Being. The phenomenology of Dasein found in Being and Time is replaced by a hermeneutic dialogue with the pre-Socratic Greeks and with poets such as Hölderlin.
There is, Heidegger believes, an originality about the thought of the early Greeks. They were in touch with Being in a way that has been subsequently lost. We need, he tells us, to make 'a painstaking effort to think through still more primally what was primally thought' (1977, p. 303). In this shift in approach—the move from an analytic of Dasein to a running conversation with the early Greek thinkers—there is a new emphasis on history. Some commentators have accused Being and Time of being ahistorical. The same charge cannot be leveled at the later works. As the 1930s moved on, Heidegger focused more and more on the 'history of Being.' He wrote of the 'Event' (Ereignis) wherein Being is unfolded within historical epochs, both giving itself to thought and withholding itself from thought.
From this perspective, the earliest Greek thought is a 'self-blossoming emergence' (Heidegger 1959, p. 14). It is primordial thought and its primal character needs to be recaptured. There at the dawn of Western civilization, it is a new beginning. As Heidegger puts it, 'the beginning, conceived primally, is Being itself (Der Anfang—anfänglich begriffen—is das Seyn selbst)' (1989, p. 58). Hence his call to think through even more primally what is primally thought.
Heidegger also directs us to poetry, telling us that 'our existence is fundamentally poetic' (1949, p. 283). Poetry can lead us to the place where Being reveals itself. It provides the 'clearing' where Being is illuminated. Thoughtful poetizing 'is in truth the topology of Being,' a topology 'which tells Being the whereabouts of its actual presence' (Heidegger 1975, p. 12). The essence of poetry is 'the establishing of being by means of the word' (Heidegger 1949, p. 282), and the poet 'reaches out with poetic thought into the foundation and the midst of Being' (Heidegger 1949, p. 289).
후기 하이데거의 그리스 철학자들과 시인들(특히 초기 그리스 사상에 깊이 몰두한 시인 횔덜린)과의 대화에서 새로운 형태의 해석학적 순환이 나타납니다. 카푸토(Caputo)가 강조하듯, 이는 존재(Being)와 존재자(beings) 사이의 순환적 과정입니다. 이 과정은 동시에 드러냄(unconcealing)과 숨김(concealing)입니다. 존재가 존재자로 '넘어오는'(coming over) 과정이며, 따라서 존재의 드러남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존재자의 '도착'(arrival)이며, 이는 존재의 숨김을 의미합니다. 이 과정을 하이데거는 'Austrag'이라고 부르며, "존재와 존재자가 서로로부터 밖으로 운반되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향해 운반되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Caputo, 1982, p. 148).
여기서 'aus-tragen'은 라틴어 'dif-ferre, dif-ferens'의 문자적 번역으로, '떨어져 나르다, 밖으로 운반하다'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Austrag는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차이(difference)에서 발생하는 '차별화(differing)'를 의미합니다. 이는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를 발생시키고, 차이를 열어줌으로써 둘을 분리시키고 동시에 적절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보내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존재는 존재자 안에서 드러남과 동시에 숨겨지는 것입니다(Caputo, 1982, pp. 151-152).
존재와 시간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해석학은 하이데거에게 존재의 드러냄을 의미합니다. 여전히 그것은 급진적인 존재론(radical ontology)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변화가 발생했습니다. 하이데거는 이제 서양 역사를 존재의 역사로 보며, 존재를 드러내는 사건(Event)에 몰두합니다. 그는 서양 사상을 '존재 망각(Seinsvergessenheit)', 즉 '존재의 망각'으로 비판해왔습니다. 초기 작업에서는 이는 존재자를 지나치게 중시하고 존재를 소홀히 여긴다는 비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후 서양 사상이 자신의 방식대로 존재를 충분히 의식했을지라도,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차이를 열어주는 것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했음을 지적합니다. 후기 하이데거에게 Seinsvergessenheit는 이를 의미합니다. 그는 우리가 초점을 사건의 결과가 아닌 사건 그 자체에 맞춰야 한다고 말합니다. 카푸토의 설명처럼(1982, pp. 2-4), "보내어진 것에 매몰되지 말고 보내는 과정을 사고해야 하며, 선물에 집착하지 말고 그것을 주는 과정을 사고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영어로는 'There is Being'(존재가 있다)라고 표현하지만, 독일어로는 'It gives (es gibt) Being'(존재를 준다)로 표현됩니다. 하이데거는 서양 형이상학이 전통적으로 간과해 온 '그것(It)'을 사고하기 위해 한 발짝 뒤로 물러서라고 요구합니다(Caputo, 1982, p. 149).
후기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는 우리가 충실히 전달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경험 속에서 우리에게 '부여'된다"(Caputo, 1982, p. 11). 이러한 경험을 충실히 전달하려는 하이데거 자신의 지속적인 시도가 그의 해석학의 핵심을 구성합니다.
In this conversation of the later Heidegger with the Greeks and the poets (and in Hölderlin he finds a poet who is himself taken up with early Greek thought) is a new form of the hermeneutic circle. As Caputo underlines, it is a circling process between Being and beings. This is at once an unconcealing and a concealing. It is a 'coming over' of Being into beings and therefore a revelation of Being. Yet it is also the 'arrival' of beings and this means a concealing of Being. In this process, called by Heidegger the Austrag, 'Being and beings are borne or carried outside of one another yet at the same time borne toward one another' (Caputo 1982, p. 148).
Now aus-tragen is the literal translation of the Latin dif-ferre, dif-ferens, to carry away from, to bear outside of. Hence the Austrag is the differing in the difference between Being and beings, that which makes the difference between them, that which opens up the difference, holding them apart and sending them to each other in the appropriate manner, so that Being revealingly conceals itself in beings. (Caputo 1982, pp. 151-2)
As in Being and Time, here too hermeneutics means for Heidegger an unveiling of Being. It still means radical ontology. A profound change has occurred, however. Heidegger now sees the history of the West as the history of Being and is preoccupied with the Event that gives Being. All along he has charged Western thought with Seinsvergessenheit, 'oblivion of Being'. Early on in his work, this was a reproach that we are preoccupied with beings to the neglect of Being. Now Heidegger changes tack. Western thought may be mindful enough of Being after its own fashion, but it has utterly ignored what opens up the difference between Being and beings. This is what Seinsvergessenheit means in the later Heidegger. He is telling us that the focus should lie with the Event rather than with the outcome of the Event. As Caputo explains (1982, pp. 2-4), we need 'to think the sending and not to be taken in by what is sent, to think the giving and not to lose oneself in the gift'. In English we say 'There is Being', but the equivalent in German is 'It gives (es gibt) Being'. Heidegger wants us to take a 'step back' and think the 'It' which Western metaphysics has traditionally left behind (Caputo 1982, p. 149).
According to the later Heidegger, then, 'Being is "granted" to us in an experience that we must make every effort to render faithfully' (Caputo 1982, p. 11). His own sustained attempt to render this experience faithfully constitutes the core of Heidegger's hermeneutics.
가다머의 역사적 해석학
한스게오르그 가다머(Hans-Georg Gadamer, 1900-2002)는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와 딜타이(Dilthey)와 거리를 두고, 자신의 스승인 하이데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참고합니다.
가다머는 인간을 철저히 역사적인 존재, 즉 '역사적으로 영향을 받은(historically effected)' 의식으로 봅니다. 바로 이러한 역사성 때문에 우리는 과거의 전통과 연결될 수 있으며, 전승된 것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가다머는 따라서 "해석학은 무언가를 이해하려는 사람이 [전통을 통해] 언어로 나타나는 주제와 결속되어 있다는 입장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Rundell, 1995, p. 32).
Rundell이 여기서 제안하는 것은 가다머의 사상의 두 가지 핵심 측면입니다.
- 우리는 전통 안에 서 있다.
- 모든 전통은 언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언어는 이해의 핵심입니다. 왜냐하면 "전통의 본질은 언어라는 매체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며, "이해 속에서 일어나는 지평의 융합(fusion of horizons)은 실제로 언어의 성취"이기 때문입니다(Gadamer, 1989, pp. 378, 389).
따라서 가다머에게 해석학적 이해는 역사적 이해입니다. 그의 해석학은 과거와 현재를 매개하는 역사적 해석학입니다. 이것은 과거의 지평과 현재의 지평을 결합합니다. 방금 본 것처럼, 가다머는 이 과정을 지평의 융합(fusion of horizons)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개념은 그의 해석학에서 핵심적인 개념으로, 가다머는 이러한 과거와 현재 사이의 역사적 매개가 모든 역사적 활동의 '효과적 기저(effective substratum)'를 형성한다고 믿습니다.
"이해는 주관적인 행위로 생각되기보다는 전통의 사건에 참여하는 것, 즉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매개되는 전승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고 가다머는 말합니다(Gadamer, 1989, p. 290).
이 지평의 융합에서 첫 번째 축은 과거입니다. 가다머의 역사적 해석학은 과거와 관련이 있습니다. "해석학적 경험은 전통과 관련된다"고 가다머는 말합니다(1989, p. 358). "이것이 경험해야 할 대상이다." 그는 이어서 "해석학적 경험의 가장 높은 형태는 역사적으로 영향을 받은 의식의 전통에 대한 개방성"이라고 설명합니다(1989, p. 361).
GADAMER'S HISTORICAL HERMENEUTICS
Hans-Georg Gadamer (1900-2002) distances himself from both Schleiermacher and Dilthey and draws on his teacher, Heidegger, in his own fashion and for his own purposes.
Gadamer sees us as thoroughly historical—as, indeed, 'historically effected' consciousnesses. It is because of this historicality that we are able to link with the tradition of the past and interpret what has been handed on.
Gadamer thus argues initially that "hermeneutics must start from the position that a person seeking to understand something has a bond to the subject matter that comes into language through [tradition]." (Rundell 1995, p. 32)
What Rundell is suggesting to us here is that there are two pivotal aspects of Gadamer's thought.
- We stand in a tradition.
- All tradition is wedded to language.
Language is at the core of understanding, for "the essence of tradition is to exist in the medium of language" and "the fusion of horizons that takes place in the understanding is actually the achievement of language" (Gadamer 1989, pp. 378, 389).
For Gadamer, then, hermeneutical understanding is historical understanding. His is a historical hermeneutics that mediates past and present. It brings together the horizon of the past and the horizon of the present. As we have just seen, he describes this process as a fusion of horizons. This proves to be a key concept in his hermeneutics, and he believes that a historical mediation of this kind between past and present underlies all historical activity as its "effective substratum."
"Understanding is to be thought of less as a subjective act than as participating in an event of tradition, a process of transmission in which past and present are constantly mediated" (Gadamer 1989, p. 290).
In this fusion of horizons, the first pole is the past. Gadamer's historical hermeneutics has to do with the past. "Hermeneutical experience is concerned with tradition," says Gadamer (1989, p. 358). "This is what is to be experienced." He goes on to tell us (1989, p. 361) that the highest type of hermeneutical experience is "the openness to tradition characteristic of historically effected consciousness."
두 번째 축은 현재, 즉 해석자의 지평입니다. 두 축을 의식적으로 결합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항상 이미' 존재합니다. 가다머는 "텍스트의 역사적 지평을 이해하는 작업은 항상 이미 지평의 융합"이라고 설명합니다(Gadamer, 1989, p. 577). 따라서 "현재의 지평은 과거 없이는 형성될 수 없습니다. 현재의 지평이 스스로 고립되어 있는 것만큼이나 습득해야 할 역사적 지평도 없습니다"(Gadamer, 1989, p. 306).
가다머가 '지평의 융합(fusion of horizons)'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 지평의 융합은 "역사적으로 영향을 받은 의식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며", 이는 "완전한 계몽의 환상을 포기함으로써 역사적 경험에 개방된 역사적으로 경험된 의식의 '실현'"입니다(Gadamer, 1989, pp. 341, 377-8).
- 지평의 융합이 필요한 이유는 전통의 역사적 생명력이 "끊임없이 동화되고 해석되는 것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해석은 "그것이 속한 해석학적 상황에 적응해야 합니다"(1989, p. 397).
- 지평의 융합은 "역사적 지평이 투영됨에 따라 동시에 초월되는" 방식입니다(1989, p. 307).
- 지평의 융합은 "우리가 역사적 과거의 개념을 다시 회복하되, 그것들이 우리의 이해를 포함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1989, p. 374).
- 지평의 융합에서 "해석자의 지평이 결정적이지만, 이는 해석자가 유지하거나 강요하는 개인적인 입장이 아니라, 해석자가 제시하고 위험을 무릅쓰며 텍스트가 말하는 바를 진정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도록 돕는 하나의 의견(opinion)과 가능성"으로 작용합니다(1989, p. 388).
- 지평의 융합은 "예술 작품의 의미의 통일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영향을 받은 의식의 핵심은 "작품과 그것의 효과를 의미의 통일성으로 사고하는 것"입니다(1989, p. 576). 지평의 융합은 "이 통일성이 스스로를 실현하는 형식을 구성하며, 이는 해석자가 작품의 원래 의미를 말하면서도 그것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해석자의 고유한 의미가 개입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1989, p. 576).
The second pole is the present, the horizon of the interpreter. Not that we need consciously to bring the two poles together. They are 'always already' there. "Working out the historical horizon of a text," Gadamer tells us (1989, p. 577), "is always already a fusion of horizons." Thus, "the horizon of the present cannot be formed without the past. There is no more an isolated horizon of the present in itself than there are historical horizons which have to be acquired" (Gadamer 1989, p. 306).
We need to look more closely at how Gadamer understands this 'fusion of horizons':
- The fusion of horizons shows "how historically effected consciousness operates" and is, in fact, the "realization" of "the historically experienced consciousness that, by renouncing the chimera of perfect enlightenment, is open to the experience of history" (Gadamer 1989, pp. 341, 377-8).
- A fusion of horizons is required because the historical life of a tradition "depends on being constantly assimilated and interpreted," so that every interpretation "has to adapt itself to the hermeneutical situation to which it belongs" (1989, p. 397).
- The fusion of horizons is such that, "as the historical horizon is projected, it is simultaneously superseded" (1989, p. 307).
- The fusion of horizons is the means whereby "we regain the concepts of a historical past in such a way that they also include our own comprehension of them" (1989, p. 374).
- The fusion of horizons is such that "the interpreter's own horizon is decisive, yet not as a personal standpoint that he maintains or enforces, but more as an opinion and a possibility that one brings into play and puts at risk, and that helps one truly to make one's own what the text says" (1989, p. 388).
- The fusion of horizons relates to "the unity of meaning" in a work of art. The very point of historically effected consciousness is "to think the work and its effect as a unity of meaning" (1989, p. 576). The fusion of horizons constitutes "the form in which this unity actualizes itself, which does not allow the interpreter to speak of an original meaning of the work without acknowledging that, in understanding it, the interpreter's own meaning enters in as well" (1989, p. 576).
이 마지막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가다머는 예술 작품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술 작품은 가다머의 사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것들은 전통 속에서 전승된 것의 가장 훌륭한 모범으로 간주됩니다. 따라서 가다머는 그의 주요 저작 진리와 방법(Truth and Method)을 미학에 관한 논문으로 시작하며, 이는 '인문학적 전통의 중요성'에 대한 섹션으로 시작하여 미학과 역사를 연결하는 부분으로 끝납니다. 가다머는 "예술 작품이 진리를 지닌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예술 현상뿐 아니라 역사 현상도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받게 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입니다(Gadamer 1989, pp. 41-42). 예술 작품은 "모든 시대와 동시대적"이며, "우리는 예술 작품을 시간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다"고 가다머는 말합니다(Gadamer 1989, pp. 120-121).
가다머의 관심은 역사적 예술 작품에 있습니다. 그는 현대 예술 작품에 대해 "학문적 의식으로는 그러한 판단이 절망적으로 불확실하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그러한 창작물을 검증할 수 없는 편견, 즉 우리가 그것에 대해 알 수 없을 만큼 너무 큰 영향을 미치는 전제 조건을 가지고 접근합니다. 이러한 전제 조건은 현대 창작물에 진정한 내용과 중요성과는 일치하지 않는 추가적인 울림을 줄 수 있습니다. 오직 그것들의 현재와의 모든 관계가 사라졌을 때 비로소 그것들의 진정한 본질이 드러나며, 그것들에서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권위 있고 보편적인 것으로 주장될 수 있습니다."
(1989, p. 297)
이렇게 시간적 거리는 여과(filtering) 기능을 수행합니다. 시간적 거리는 "새로운 오류의 원천을 배제"하고 "새로운 이해의 원천을 제공"합니다(Gadamer 1989, p. 298). 이 여과 과정은 "끊임없는 움직임과 확장을 통해 작용하며, 지역적이고 제한된 편견을 소멸시킬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이해를 가져오는 편견이 명확히 드러나도록 한다"고 설명합니다(Gadamer 1989, p. 298).
가다머가 언급하는 '편견(prejudices)'은 한 사람의 문화에서 비롯된 유산된 관념들입니다. 이 편견은 가다머의 분석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는 개인의 행동보다 이러한 편견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가다머는 현대 예술 작품에 큰 관심을 두지 않으며, 예술 작품에 대한 우리의 '판단'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편견에 있으며, 그는 현대 사상이 편견을 대하는 냉소적 태도로부터 이를 구원하려고 힘씁니다. 그는 이미 이해가 주관적인 행위라기보다는 우리가 전통 안에 자리 잡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는 역사에 대한 사적 접근의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우리가 물려받은 편견은 "사회와 국가라는 거대한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며, 자기 인식을 통해 기록된 개인적 판단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자기 성찰과 자서전, 즉 딜타이의 출발점은 근본적이지 않으며, 따라서 해석학적 문제의 적절한 토대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역사를 다시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실, 역사는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역사에 속해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성찰의 과정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기 훨씬 전에, 우리가 살고 있는 가족, 사회, 국가 안에서 자명하게 자신을 이해합니다. 주관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왜곡된 거울입니다. 개인의 자기 인식은 역사적 삶의 닫힌 회로 속에서 깜빡이는 현상일 뿐입니다. 따라서 개인의 편견은 그의 판단보다 훨씬 더 그의 존재의 역사적 현실을 구성합니다."
(Gadamer 1989, pp. 276-277)
In this last citation, you will notice, Gadamer is referring to works of art. Artworks figure prominently in his thought. They are for him the exemplar par excellence of what is handed down in tradition. Thus, Gadamer begins his major work Truth and Method with a treatise on aesthetics, which opens with a section on "the significance of the humanist tradition" and concludes by linking aesthetics and history. We must acknowledge, he says, "that the work of art possesses truth." This is an acknowledgment that "places not only the phenomenon of art but also that of history in a new light" (Gadamer 1989, pp. 41-2). Artworks "are contemporaneous with every age" and "we have the task of interpreting the work of art in terms of time" (Gadamer 1989, pp. 120-1).
Gadamer's interest lies in historical works of art. We cannot really judge contemporary works, he feels, for any such judgment "is desperately uncertain for the scholarly consciousness."
"Obviously we approach such creations with unverifiable prejudices, presuppositions that have too great an influence over us for us to know about them; these can give contemporary creations an extra resonance that does not correspond to their true content and significance. Only when all their relations to the present time have faded away can their real nature appear, so that the understanding of what is said in them can claim to be authoritative and universal."
(1989, p. 297)
Temporal distance thus performs a filtering function. It excludes "fresh sources of error" and offers "new sources of understanding" (Gadamer 1989, p. 298). Itself subject to "constant movement and extension," the filtering process "not only lets local and limited prejudices die away, but allows those that bring about genuine understanding to emerge clearly as such" (Gadamer 1989, p. 298).
The "prejudices" that Gadamer is referring to are the inherited notions derived from one's culture. Prejudices in this sense play a central role in Gadamer's analysis. They are far more important in that analysis than any individual actions we might carry out. Not only is Gadamer not really interested in contemporary artworks, as we have just seen, but, for all his talk about our "judgment" on works of art, he is not interested in individual judgments either. His concern lies with prejudices, and he strives mightily to redeem the notion of prejudice from the dismissiveness with which it is regularly greeted in current thought. He has already told us that understanding is not so much a subjective act as a placing of ourselves within a tradition. Now he warns us against the privatizing of history. Our inherited prejudices stem from "the great realities of society and state" and are immeasurably more important than the individual judgments recorded in self-awareness.
"Self-reflection and autobiography—Dilthey's starting points—are not primary and are therefore not an adequate basis for the hermeneutical problem, because through them history is made private once more. In fact, history does not belong to us; we belong to it. Long before we understand ourselves through the process of self-examination, we understand ourselves in a self-evident way in the family, society, and state in which we live. The focus of subjectivity is a distorting mirror. The self-awareness of the individual is only a flickering in the closed circuits of historical life. That is why the prejudices of the individual, far more than his judgments, constitute the historical reality of his being."
(Gadamer 1989, pp. 276-7)
왜곡된 거울? 역사적 삶의 닫힌 회로에서 단지 깜빡이는 현상일 뿐? 가다머는 '개인적인' 역사에 대해 탐구하려는 많은 연구자들에게 큰 위안을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 인식', '자서전', '자기 성찰'에 매우 집중하며, 흥미롭게도 그들 중 일부는 이를 위해 가다머의 지지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가다머는 분명히 그들의 편이 아닙니다.
가다머에게 출발점은 현대 인문주의에서 찬양받는 자율적 개인(self)이 아닙니다. 그의 출발점은 우리가 서 있는 전통이며, 우리가 이를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속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역사에 속합니다! 이 입장은 가다머가 자신의 역사적 해석학에 대한 모델을 찾는 과정에서 확인됩니다. 그는 자신이 찾는 모델을 신학적 해석학과 법적 해석학에서 발견합니다. 가다머에 따르면, 우리는 문화적 전통을 성경을 다루는 주석가와 법을 다루는 법학자들이 하는 방식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즉, 전통을 '주어진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과 법의 경우, 주석가나 법학자의 해석적 노력은 텍스트를 소유하거나 지배하려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석가와 법학자처럼, 우리 역시 우리의 해석적 노력을 "텍스트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겠다는 주장에 스스로를 복종시키는 것"으로, 그리고 "유효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섬기는 행위"로 간주해야 합니다(Gadamer 1989, p. 311).
전통의 대부분은 비록 "끊임없이 동화되고 해석된다"(Gadamer 1989, p. 397) 하더라도, 여전히 그러한 존경과 섬김에 대한 자격을 입증해야 합니다. 전통은 그것이 보여주는 통일성과 일관성을 통해 그 자격을 입증합니다. 가다머에게 문화적 전통은 의미의 우주입니다. 전승된 텍스트의 의미는 전통 전체에 의해 결정되며, 전통 전체는 그 안에서 전승된 텍스트의 의미를 포함하는 통일체입니다.
가다머는 우리가 전통을 이러한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이해의 과정은 항상 전체에서 부분으로, 그리고 다시 부분에서 전체로 이동합니다. 우리의 과제는 이해된 의미의 통일성을 원심적으로 확장하는 것입니다. 모든 세부 사항과 전체의 조화는 올바른 이해의 기준입니다. 이러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이해가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989, p. 291)
이것이 가다머의 위대한 해석학적 규칙입니다. 우리는 전체에서 부분으로, 부분에서 전체로 이동하며, 이해의 통일성을 점점 더 넓은 원으로 확장해야 합니다. 브렌크만(Brenkman)은 이러한 원칙에 문제를 제기합니다(1987, pp. 26-44). 가다머는 이를 방법론적 도구로 부과하면서(그것은 우리의 '과제'입니다), 동시에 전통을 유기적 통일체로 경험하는 것이 방법 이전(premethodological)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가다머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지려고 하는 것일까요? 브렌크만의 비판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가다머가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통일성이 전통 안에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가다머가 우리가 전통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방식에서 전통에 부여된 것일까요?
A distorting mirror? Only a flickering in the closed circuits of historical life? Gadamer offers little comfort here to the many researchers who are eager to inquire into "private" history. They focus quite intensely on "self-awareness," "autobiography," "self-examination," and "self-reflection," and, curiously, a number of them invoke Gadamer's support in doing so. But he is obviously not on their side.
For Gadamer, the starting point is not the autonomous individual self so lionized in current versions of humanism. His starting point is the tradition in which we stand and which we are meant to serve. History does not belong to us. We belong to history! We find this stance confirmed as Gadamer looks for models for his historical hermeneutics. He finds the models he is after in theological hermeneutics and legal hermeneutics. According to Gadamer, we are to consider the cultural tradition in the same light as the exegete considers the Scriptures and the jurist considers the law, that is, as a "given." In the case of sacred texts and the law, the interpretative efforts of exegetes or jurists are obviously not to be seen in the light of "an appropriation as taking possession" of the texts or a "form of domination" of the texts. Like the exegete and the jurist, we too must see our hermeneutical endeavors as "subordinating ourselves to the text's claim to dominate our minds" and as a "service of what is considered valid" (Gadamer 1989, p. 311).
Most forms of the tradition, "constantly assimilated and interpreted" though they may be (Gadamer 1989, p. 397), still have to prove themselves worthy of such obeisance and service. They do so through the unity and coherence they display. For Gadamer, the cultural tradition is a universe of meaning. The meaningfulness of transmitted texts is determined by the tradition as a whole, just as the tradition as a whole is a unity comprising the meaning of the texts transmitted within it.
Gadamer insists that we read the tradition in this way:
"Thus the movement of understanding is constantly from the whole to the part and back to the whole. Our task is to expand the unity of the understood meaning centrifugally. The harmony of all the details with the whole is the criterion of correct understanding. The failure to achieve this harmony means that understanding has failed." (1989, p. 291)
This is Gadamer's great hermeneutic rule. We are to extend the unity of understanding in ever-widening circles by moving from whole to part and from part to whole. Brenkman, for one (1987, pp. 26-44), finds this principle problematic. Gadamer imposes it as a methodological tool (it is our "task"); yet he wants to claim that our experience of the tradition as an organic unity is premethodological. Is Gadamer wanting to have it both ways, then? Brenkman's criticism is not without foundation. Is the unity, which Gadamer values so highly, inherent in the tradition, as he claims? Or is it imparted to the tradition by the way in which he insists that we read it?
게다가, 전통의 형태들 중에서는 이와 같은 검증조차도 필요하지 않은 형태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전(classical)'의 형태입니다. 가다머는 "고전은 역사적 존재의 일반적인 특징을 요약하는데, 이는 시간의 폐허 속에서도 보존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1989, p. 289). 다른 전통의 형태들을 마주할 때 우리는 거리의 장벽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고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가다머는 "우리가 '고전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역사적 거리를 극복하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의 지속적인 매개를 통해 스스로 이러한 거리를 극복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1989, p. 290).
고전은 변화하는 시간과 변화하는 취향의 변덕을 초월한 어떤 것입니다. 그것은 즉각적으로 접근 가능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고전적이라고 부를 때, 거기에는 변함없는 어떤 것, 시간이 초월한 의미가 있다는 의식이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는 어떤 시간의 상황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모든 다른 현재와 동시대적인 일종의 '시간을 초월한 현재'입니다." (Gadamer, 1989, p. 288)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가다머는 종교적 및 법적 해석학을 모델로 사용하며, 해석학자들에게 "의미의 유효성을 섬기라"고 요청합니다. 이 유효성은 모든 고전적 작품에서, 그리고 가다머의 통일성과 일관성 테스트를 통과하는 전통의 다른 형태에서도 발견됩니다. 브렌크만(Brenkman)은 이러한 접근이 작품의 생성과 수용의 사회적 맥락을 무시하며, 두 과정 모두에 내재된 헤게모니와 억압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이며, 보다 비판적인 분석가들의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예를 들어,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는 가다머의 전통 수용에 대해 특히 문제를 제기하며, 이와 다른 문제들에 대해 가다머와 오랜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 대화는 하버마스를 '비판적 해석학(critical hermeneutics)'으로 이끌었습니다. 아펠(Apel) 및 다른 학자들과 함께 하버마스는 어떤 해석학도 이해가 발생하는 환경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 환경은 사회적, 역사적, 담론적이며,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힌 전장이기 때문에 분석가나 연구자는 이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다음 두 장의 논의는 이 점을 강조할 것입니다.
Moreover, there are forms of the tradition that escape the need even for this kind of validation. These are "classical" forms. The classical, Gadamer tells us, "epitomizes a general characteristic of historical being: preservation amid the ruins of time" (1989, p. 289). In confronting other forms of the tradition, we need to overcome the barrier of distance. Not so with the classical. "What we call 'classical'," Gadamer tells us, "does not first require the overcoming of historical distance, for in its own constant mediation it overcomes this distance by itself" (1989, p. 290).
The classical is something raised above the vicissitudes of changing times and changing tastes. It is immediately accessible.
"... when we call something classical, there is a consciousness of something enduring, of significance that cannot be lost and that is independent of all the circumstances of time—a kind of timeless present that is contemporaneous with every other present." (Gadamer, 1989, p. 288)
What is one to make of this? Gadamer uses religious and legal hermeneutics as models and calls on hermeneuticists to "serve the validity of meaning." This validity is taken, without further ado, to be found in all classical works. It is also found in any other forms of the tradition that pass Gadamer's unity-and-coherence test. As Brenkman points out, this approach ignores the social site of the work's genesis and the social site of its reception and takes no account of the hegemony and oppression inherent in both of them. This is an essentially conservative position and has drawn the fire of more critically minded analysts. Jürgen Habermas, for example, finds Gadamer's embrace of tradition particularly problematic, and he has engaged in debate with him over many years on this and other issues.
This dialogue has led Habermas to a "critical hermeneutics." Joined by Apel and others, Habermas is insistent that no hermeneutics can prescind from the setting in which understanding occurs. At once social, historical, and discursive, this setting is the battleground of many interests, and no analyst or researcher can afford to ignore it, as the discussion in the next two chapters will highlight.
해석학, 독서 이론, 문학 비평
해석학은 독서 행위와 관련된 많은 학문 분야에서 활용됩니다. 여기에는 문학 비평과 독해 이론이 포함됩니다. Stanley Straw는 "해석학은 독서 행위를 통해 의미를 만들어내려는 모든 비평과 관련된 활동"이라고 주장합니다(1990b, p. 75). 그러나 모두가 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허시(Hirsch)는 "의미와 중요성을 엄격히 구분"하는 관점에 기반하여 해석학과 문학 비평을 명확히 구분합니다(1967, p. 142).
독서 이론과 문학 비평에서 해석학의 적절한 위치를 인정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많은 상반된 견해가 존재합니다. 이러한 논의는 주로 해석에서 작가, 텍스트, 독자 각각에 부여되는 위치와 지위에 관한 것입니다. 실제로 해석 이론을 작가나 텍스트를 중시하는 한쪽 끝에서 독자를 중시하는 반대쪽 끝까지 이어지는 스펙트럼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스펙트럼 관점에서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를 어디에 위치시킬 수 있을까요? 정확한 위치를 지정하기는 어렵겠지만, 에코는 어느 극단과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분명히 그는 독자를 중시하는 쪽 끝에는 속하지 않습니다. 에코는 지난 수십 년 동안 해석에서 독자에게 과도한 역할이 부여되었다고 믿습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그는 텍스트 자체에서 표현되고 텍스트 자체에 의해 드러나는 의도, 즉 intentio operis(작품의 의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1992, pp. 64-66). 이는 독자가 읽기에 부여하거나 읽기에 스며드는 개인적 목적을 의미하는 intentio lectoris(독자의 의도)와 대조됩니다.
이는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의 intentio operis와 intentio operantis 사이의 전통적인 구분을 반영합니다. intentio operis는 수행되는 행위에 내재된 목적을 의미하며, intentio operantis는 행위자가 행위에 부여하는 목적을 의미합니다. 해석학의 맥락에서 에코는 이러한 구분을 사용하여 독자를 지나치게 중시하는 현대적 경향에 저항합니다. 독자의 역할을 과도하게 강조하면, 에코가 '과잉 해석(overinterpretation)'이라고 부르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이는 무차별적이고 통제되지 않은 해석의 홍수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에코는 "의미의 지속적인 미끄러짐"이라는 개념에 대해 언급하며(1992, p. 34), 이는 많은 포스트모더니즘 비평 이론에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에코가 텍스트의 의미가 불확정적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거나, 해석에서 독자의 비판적 역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접근 방식은 다양한 해석이 나타날 수 있는 여지를 허용합니다. 그러나 그는 일정한 한계를 설정하고자 합니다. 에코는 메시지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터무니없는 의미를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주장합니다(1992, p. 43).
HERMENEUTICS, READING THEORY, AND LITERARY CRITICISM
Hermeneutics is invoked in many fields of inquiry relating to the act of reading. These include literary criticism and reading comprehension theory. As Stanley Straw asserts, "hermeneutics ... is an activity related to all criticism in its attempt to make meaning out of the act of reading" (1990b, p. 75). Not everybody agrees. Hirsch, for example, makes a sharp distinction between hermeneutics and literary criticism based on a "rigid separation of meaning and significance" (1967, p. 142).
Even among those who accord hermeneutics a rightful place in reading theory and literary criticism, there have been, and are, many conflicting viewpoints. In the main, these have to do with the respective place and status to be accorded in interpretation to author, text, and reader. One might, in fact, conceive of interpretation theory as a continuum that privileges author or text at one end and reader at the other.
If we do conceive interpretation theory as a continuum of that kind, at what point on the spectrum would we place someone like novelist and critic Umberto Eco? While it would be difficult to position him with any kind of precision, he would have to be seen as standing at some distance from either extreme. On any accounting, he would not be up at the end that privileges the reader. For several decades now, Eco believes, the role ascribed to the reader in the task of interpretation has been exaggerated. In reaction to this, he draws attention (1992, pp. 64-6) to the importance of the intentio operis (literally, the "intention of the work," that is, the purpose expressed in and by the text itself) over against the intentio lectoris (the "intention of the reader," that is, the personal purpose that the reader brings to the reading or infuses into the reading).
This reflects a time-honoured Scholastic distinction between intentio operis and intentio operantis. The former is a purpose intrinsic to the action being done, while the latter is a purpose brought to the action by the agent. In the context of hermeneutics, Eco uses this distinction to resist the prevailing trend to privilege the reader. Overemphasizing the reader's role leads to what he dubs "overinterpretation." It opens the floodgates to an undifferentiated torrent of interpretations. Eco refers (1992, p. 34) to "the idea of the continuous slippage of meaning" found in many postmodernist concepts of criticism.
Not that Eco is overlooking the extent to which textual meanings can be indeterminate. Nor is he denying the reader a genuinely critical role in interpretation. His approach allows for many diverse interpretations to emerge. Yet he does want to set some limits. A message, Eco says (1992, p. 43), "can mean many things but there are senses it would be preposterous to accept."
에코가 확립하려는 것은 intentio operis와 intentio lectoris 사이의 '변증법적 연결'입니다. 에코는 독자가 논의 중인 작품의 목적에 대해 어느 정도 아이디어를 가져야 한다고 느낍니다. 텍스트는 분명히 어떤 "무엇"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무엇에 관한 것(aboutness)'을 엿보는 것은 독자에게 방향감을 제공합니다. 그렇다면 독자는 자신의 intentio operis에 대한 가정이 정당한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앞서 언급한 고대 그리스인들과 가다머의 해석학적 규칙과 마찬가지로, 에코는 텍스트가 일정한 통일성과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만약 독자의 'aboutness 감각'이 작품 전체에 걸쳐 유지된다면, 독자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에코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텍스트의 내부적 일관성은 독자의 통제할 수 없는 충동을 억제한다" (Eco, 1992, p. 65).
에코의 관점은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일부는 그가 너무 관대하다고 보고, 다른 일부는 그를 지나치게 제한적이라고 평가합니다.
- 먼저, 에코의 목적 강조를 환영하지만, 그가 충분히 나아가지 않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intentio operis를 호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intentio auctoris(작가의 의도)를 확인하고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비평가들의 태도는 단순 명료합니다. "텍스트는 작가가 의도한 대로 의미한다"고 Knapp와 Michaels는 말합니다(1985, p. 469). 이것은 매우 전통적인 독서 접근 방식입니다.
- 반면, 에코의 관점을 지나치게 제한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선, 이들은 모든 텍스트가 에코가 기대하는 의도를 뒷받침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통일성과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을 의심합니다. 더욱이, intentio operis나 intentio auctoris로 해석을 제한하는 것은 실제로 해석자를 '정통적(canonical)' 또는 '고전적(classical)' 텍스트 해석으로 종속시키며, 다른 방식의 해석을 배제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합니다. 이는 해석의 풍요로움을 빈약하게 만든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페미니스트 작가 Adrienne Rich의 유명한 '재-해석(re-vision)' 요청을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1990, pp. 483-484). Rich는 재-해석을 "과거를 되돌아보는 행위,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행위, 새로운 비판적 방향으로 오래된 텍스트에 접근하는 행위"라고 정의합니다. 재-해석은 문학에 대한 급진적인 페미니즘적 비평으로, 여성이 살아온 방식과 여성이 '다시 보고, 이름 붙이고, 따라서 새롭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는 도구로 문학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Rich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글쓰기를 알고, 이전과는 다르게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끊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유형의 페미니스트 해석학에서는 작가적 의도나 텍스트적 의도에 초점을 두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해석의 진정성과 의미의 풍부함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누가 이를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What Eco is attempting to establish is a dialectical link between intentio operis and intentio lectoris. The reader, he feels, ought to have some ideas regarding the purpose of the work in question. The text, surely, is about something. Glimpsing this "aboutness" provides readers with a sense of direction. How will readers know whether their assumptions about the intentio operis are justified? Rather like the ancient Greeks referred to earlier, and like Gadamer with his hermeneutic rule, Eco believes that texts have a certain unity and coherence. One may have confidence in one's "sense of aboutness" if it holds up throughout the entire work. If it does not hold up, one needs to think again. Thus, "the internal textual coherence controls the otherwise uncontrollable drives of the reader" (Eco, 1992, p. 65).
Eco's standpoint has many critics. Some find him too liberal. Others find him too restricting.
First of all, there are those who welcome Eco's emphasis on purposes but feel he does not go far enough. It is not enough, they suggest, to invoke intentio operis. Intentio auctoris—authorial intent—must be identified and taken into account. The attitude of such critics tends to be straightforward, if nothing else. "A text means what its author intended it to mean," write Knapp and Michaels (1985, p. 469). This, of course, is a very traditional approach to reading.
There are others, however, for whom Eco's viewpoint is far too restrictive. For a start, they question his assumption that all texts have sufficient unity and coherence to ground the intention he looks to establish. Moreover, they fear, to limit authentic interpretation to what is considered intentio operis or intentio auctoris means in practice to subject the interpreter to "canonical" or "classical" readings of the text and preclude other ways of interpreting it. This, in their view, is impoverishing.
One thinks, for instance, of feminist author Adrienne Rich's celebrated call to "re-vision" texts (1990, pp. 483-4). She defines re-vision as "the act of looking back, of seeing with fresh eyes, of entering an old text from a new critical direction." Re-vision means a radical feminist critique of literature, which will use literature as a clue to how women have been living and how women can "begin to see and name—and therefore live—afresh." "We need," says Rich, "to know the writing of the past, and know it differently than we have ever known it; not to pass on a tradition but to break its hold on us." In a feminist hermeneutic of this kind, for all its lack of focus on authorial or textual intent, there is surely both authenticity of interpretation and richness of meaning. Who would deny that?
이러한 관점들—해석을 작가의 의도를 식별하는 것으로 보거나, 텍스트 자체에 내재된 의도를 찾거나, 의미 생성에서 독자를 중심에 두는 것으로 보는 관점—은 다양한 변형들과 함께 문학 비평과 독해 이론의 역사에 구현되어 있습니다. Straw와 Sadowy(1990, p. 22)는 "독서 개념화의 역사"를 추적하며 다음과 같은 변화를 지적합니다.
- "독서를 전달(transmission) 개념으로 본 시기(대략 1800년부터 1890년까지)"
- "독서를 번역(translation) 개념으로 본 시기(대략 1890년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 "현재 독서 이론에서 주도적인 상호작용(interactive) 개념으로 본 시기"
또한, 저자들은 최근 몇 년 동안 독서를 "거래(transactional)적이고 구성주의(constructionist)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추가적인 움직임을 감지합니다(1990, p. 22).
Straw는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며, 북미 문학 이론에서 역사적으로 발생한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동일한 단계를 식별합니다.
- 전달 시기: 이 시기에는 작가의 의도가 강조되었습니다. Straw는 "실증주의/표현적 현실주의 개념의 문학 이론과 비평이 20세기 초까지 영문학 연구를 단단히 지배했다"며, "텍스트를 읽는 것은 작가를 읽는 것과 같았다"고 말합니다(1990a, p. 53).
- 번역 시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달 시기는 번역 시기로 대체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러시아 형식주의가 유럽 대륙에서, 신비평(New Criticism)이 영미권에서 등장하며 텍스트에 대한 형식주의적 접근법이 발전했습니다. 이는 19세기의 작가 숭배를 20세기의 텍스트 실체화로 대체한 것입니다. 신비평가들은 "작품 내에 분석에 필요한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했으며, 비평가와 영문학 교사들이 작품 외부—작가의 삶, 그의 시대의 역사, 문학 작품의 사회적·경제적 함의—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습니다"(Guerin et al., 1979, p. 75).
- 그러나 번역 시기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유럽에서 먼저, 그리고 이후 영미권에서 이 시기는 상호작용 시기로 대체되었습니다. 시스템 접근법이 문학에도 적용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문학에서 구조주의(structuralism)"라고 불리는 것으로 정점에 이르렀습니다(Straw 1990a, p. 58). 구조주의 사상은 소쉬르(Saussure)의 언어학 원칙에서 발전하였으며, 다양한 분야에 적용되었습니다. 문학 비평에서 이는 "구조를 체계적으로 사용하여 특정 텍스트를 해석할 수 있다"는 신념을 공유하는 매우 정교한 접근법의 확산으로 이어졌습니다(Straw 1990a, p. 61).
These viewpoints—seeing interpretation as essentially an identification of authorial intent, or looking instead to an intention intrinsic to the text as such, or making the reader pivotal in the generation of meaning—are embodied, with their many variants, in the history of both literary criticism and reading comprehension theory. Tracing "the history of conceptualizations of reading," Straw and Sadowy (1990, p. 22) point to a movement "from a transmission notion of reading (roughly, from 1800 to 1890), to a translation notion of reading (roughly, 1890 to the late 1970s), to an interactive notion of reading (a notion predominant now within the reading establishment)." The authors detect a further movement over the past few years to "transactional and constructionist notions of reading" (1990, p. 22).
Straw uses the same terms, and identifies the same phases, to characterize changes that have occurred historically within literary theory in North America.
- Transmission phase: During this period, emphasis was on the author’s intentions. "Positivist/expressive realism notions of literary theory and criticism held English studies in a choke-hold well into the twentieth century," writes Straw (1990a, p. 53); "reading the text was the same as reading the author."
- Translation phase: After World War I, the transmission phase was followed by a translation phase. Formalist approaches to texts emerged—in the shape of Russian Formalism in continental Europe and New Criticism in Anglo-American circles. This move replaced nineteenth-century deification of the author with a twentieth-century reification of the text. The New Critics "insisted on the presence within the work of everything necessary for its analysis; and they called for an end to any concern by critics and teachers of English with matters outside the work itself—the life of the author, the history of his times, or the social and economic implications of the literary work" (Guerin et al. 1979, p. 75).
- The translation phase, however, did not last. In Europe, first of all, and then in the Anglo-American world, it gave way to an interaction phase. A systems approach began to be applied to literature, as elsewhere, and this "culminated in what has been called 'Structuralism in Literature'" (Straw 1990a, p. 58). Structuralist thought, growing out of the linguistic principles of Saussure, came to be applied to many diverse fields. In literary criticism it led to a proliferation of highly nuanced approaches that, for all their diversity, share a belief "that structures can be used systematically to reach an interpretation of any particular text" (Straw 1990a, p. 61).
이 접근법들(심지어 명목상 반구조주의(opponents of structuralism)와 대립한다고 주장하는 이들까지도)이 공유하는 또 다른 공통점은 문학 비평이 상호작용적(interactionist)이라는 이해입니다. 물론 초기 단계에서는 해석이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로 간주되었습니다. 상호작용 단계에서도 이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이제는 본질적으로 *상호 커뮤니케이션(intercommunication)*으로 간주됩니다. 이는 저자에서 독자로 메시지가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매개로 저자와 독자 간의 상호작용(interplay)을 의미합니다.
독서와 비평을 상호작용으로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이는 발전의 종말을 의미하거나 심지어 발전 속도가 느려진다는 신호도 아닙니다. 텍스트 해석과 관련된 사고는 이미 상호작용 단계를 넘어섰습니다. Straw에 따르면, 이는 '커뮤니케이션을 넘어선' 발전입니다. 이제 등장한 것은 독서와 해석에 대한 거래(transactional)적 이해입니다.
"커뮤니케이션 모델에 기반한 독서 개념화와는 대조적으로, 거래 모델은 독서가 정보나 커뮤니케이션을 단순히 수신하거나 처리하는 것 이상의 더 생성적인 행위라고 제안합니다. 거래적 관점에서, 의미는 저자의 의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며 텍스트에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의미는 독자가 독서 행위 중에 구성합니다. 독자는 의미를 창조하거나 구성하기 위해 다양한 지식 자원을 활용합니다."
(Straw, 1990b, p. 68)
이는 앞서 구성주의(constructivism)와 관련하여 논의했던 내용과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Straw는 텍스트에 대해, 메를로-퐁티(Merleau-Ponty)와 같은 학자들이 세계와 세계의 사물에 대해 말한 것과 동일하게, 그것들의 의미가 불확정적(indeterminate)이라고 언급합니다. 이러한 불확정성을 고려할 때, "거래적 이론은 의미가 독자와 그들이 읽고 있는 텍스트 간의 능동적인 협상을 통해 창조된다고 제안합니다." 여기서 일어나는 것은 텍스트에 대한 반응으로 '의미를 생성'하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거래적 차원에 대한 인식은 독일의 수용 이론가들, 프랑스의 후기 구조주의자들, 그리고 영미권의 독자 반응 비평가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Straw, 1990b, p. 73).
각 시기는 독서 행위를 이해하거나 텍스트 비평 과정을 분석하는 특정한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배타적인 방식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는 독서와 해석의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각각의 방식은 연구자가 데이터를 수집하고, 특히 수집한 데이터를 해석할 때 제공할 수 있는 고유한 장점이 있습니다. 저자, 텍스트, 독자를 강조하는 접근법은 상호 배타적이거나 호환 불가능한 옵션으로 간주될 필요는 없습니다.
These viewpoints (and even share with their allegedly anti-structuralist opponents) is an understanding that literary criticism is interactionist in nature. In the earlier phases, to be sure, interpretation had been seen as a matter of communication. This remains the case in the interactive phase, even if it is now seen as essentially intercommunication—not one-way transmission of a message from author to reader but interplay between author and reader via the text.
Important as it is, the understanding of reading and criticism as interaction does not signal an end to development, or even a slowing of development. Thinking in relation to interpretation of texts has already moved on from its interactive phase. It has moved "beyond communication," Straw tells us. What has emerged is a transactional understanding of reading and interpretation.
"In contrast to conceptualizations of reading built on the communication model, transactional models suggest that reading is a more generative act than the receipt or processing of information or communication. From the transactional view, meaning is not a representation of the intent of the author; it is not present in the text; rather, it is constructed by the reader during the act of reading. The reader draws on a number of knowledge sources in order to create or construct meaning."
(Straw, 1990b, p. 68)
This, we will note, relates closely to our earlier considerations under the rubric of constructivism. Straw goes on to say of texts what others, like Merleau-Ponty, have said of the world and objects in the world, namely, that their meaning is indeterminate. Given such indeterminacy, "transactional theories suggest that meaning is created by the active negotiation between readers and the text they are reading." What is happening is a "generating of meaning in response to text." Recognition of this transactional dimension is found in reception theorists in Germany, post-structuralists in France, and reader-response critics in the Anglophone countries (Straw, 1990b, p. 73).
While different periods emphasize particular ways of understanding the act of reading or analyzing the process of textual criticism and tend to portray each of them in exclusivist fashion, perhaps we should just acknowledge that there are different ways of reading and interpreting. Each way has something to offer researchers as they gather their data and especially as they interpret the data they have gathered. Approaches that privilege author, or text, or reader, need not be seen as either watertight compartments or incompatible options.
일부 학자들은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작가의 의도나 텍스트의 형식과 내용을 중시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대합니다. 그들은 이것이 해석자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해석자가 텍스트와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소통하고, 제한 없이 의미를 구성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자유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작가의 인격, 삶과 시대, 명시적 또는 암시적 의도를 고려하는 독서를 무효화하는 것은 해석자에게 심각한 제한을 가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텍스트의 특징 자체에 직접 의존하는 해석을 무시하는 것도 해석자에게 심각한 제한을 가하는 것입니다. 해석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읽고 해석할 자유를 가질 때 가장 자유로울 것입니다.
해석 접근법
- 공감적(empathic) 접근
- 텍스트에 접근하는 첫 번째 방식은 공감적 접근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 접근법은 개방성과 수용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히 읽기에서 유용한 정보를 추출하는 것을 넘어섭니다. 작가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고,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우리는 작가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려고 노력하며, 작가의 마음과 인격에 들어가려고 시도합니다. 작가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입장이 아닐 수 있지만, 우리는 작가가 그 입장에 도달한 방식과 그것의 근거를 호기심으로 탐구합니다.
- 상호작용적(interactive) 접근
- 상호작용적 접근에서는 단순히 작가의 말을 듣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화를 나눕니다. 작가가 말하는 바에 대해 우리의 응답이 개입하는 일종의 지속적인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대화는 우리가 이 대화를 시작하며 가졌던 아이디어에 가장 형성적이고 성장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우리의 읽기가 비판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는 '결에 반하여 읽기(reading against the grain)'가 될 수 있습니다.
- 거래적(transactional) 읽기 방식
- 거래적 모드의 읽기에서는 텍스트와의 교류를 통해 우리가 가져온 것을 단순히 세련되게 하거나 확장하거나 확대하는 것을 넘어섭니다. 이 교류에서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가 탄생합니다. 드러나는 통찰은 작가의 마음에도, 작가의 텍스트에도, 우리가 텍스트를 읽기 위해 들었을 때에도 없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텍스트와 상호작용하는 과정 속에서 새롭게 생겨난 것입니다.
연구와 해석의 연결
이것들은 모두 가능한 읽기 방식입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방식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방식 중 하나 혹은 여러 가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모드들은 우리가 연구 데이터를 텍스트로 인식할 때, 심지어 인간 상황과 상호작용을 텍스트로 여길 때 제안적이고 환기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해석학적 맥락에서 읽기 방식은 연구 방식으로 변모(transfigured)됩니다.
Some scholars, as we have seen, inveigh against giving weight to authorial intent or to textual form and content. They do so on the ground that this inhibits the freedom of the interpreter. They want to see the interpreter left free to engage uninhibitedly with the text and able to construct meaning without restraint. Yet, if we are talking about freedom, it is surely a gross limitation on interpreters to regard as null and void any readings that look to the author's personality, or the author's life and times, or the author's stated or implied intentions. It is equally a gross limitation on interpreters to dismiss interpretations that draw directly on features of the text as such. Interpreters would seem to be most free when they are left at liberty to read and interpret in a wide variety of ways.
Approaches to Interpretation
- Empathic Approach
A first way to approach texts might be described as empathic. This is an approach characterized by openness and receptivity. Here we do more than extract useful information from our reading. The author is speaking to us and we are listening. We try to enter into the mind and personage of the author, seeking to see things from the author’s perspective. We attempt to understand the author’s standpoint. It may not be our standpoint; yet we are curious to know how the author arrived at it and what forms its basis. - Interactive Approach
There can also be an interactive approach to texts. Now we are not just listening to the author. We are conversing. We have a kind of running conversation with the author in which our responses engage with what the author has to say. Dialogue of this kind can have a most formative and growthful impact on ideas we brought to the interchange. Here, in fact, our reading can become quite critical. It can be reading "against the grain." - Transactional Mode of Reading
Then there is the transactional mode of reading. What happens in this mode is much more than refinement, enhancement, or enlargement of what we bring to our engagement with the text. Out of the engagement comes something quite new. The insights that emerge were never in the mind of the author. They are not in the author’s text. They were not with us as we picked up the text to read it. They have come into being in and out of our engagement with it.
Connection Between Research and Interpretation
These are all possible ways of reading. There are others beside. And we are free to engage in any or all of them. These various modes prove suggestive and evocative as we recognize research data as text—and, even before that, as we take human situations and interactions as text. In this hermeneutical setting, ways of reading are transfigured as ways of researching.
독서 이론과 문학 비평에서 등장하는 해석학은 슐라이어마허, 딜타이, 하이데거, 가다머, 리쾨르의 해석학에 비해 훨씬 더 평범한 것으로 보입니다. 독서 이론과 문학 비평에서는 해석학이 단순히 해석의 동의어처럼 보입니다. 또한, 연구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이 용어가 사용되는 많은 현대적 사례에서도 해석학은 단순히 해석의 동의어를 넘어서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더 철학적이고 특히 더 역사적인 용법에서는 해석학이 다소 신비로운 매력을 지닙니다. 우리가 딜타이의 인간 역사 속 사회적 사건을 형성하는 보편적 정신적 형식에 대해 이야기하든, 하이데거의 존재를 부여하는 사건(Event)을 찾는 탐구에 대해 이야기하든, 혹은 가다머의 과거와 현재 간의 지평 융합에 대해 이야기하든, 이 모든 과정은 웅장함과 깊이, 그리고 독특한 아우라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의 해석학은 단순한 해석 시도 이상의 무언가로 보입니다.
이 두 가지 형태를 지나치게 엄격히 분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문학 비평가들은 하이데거나 가다머를 인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된 신비로움은 관찰과 인터뷰를 활용하고 주요 주제를 비교적 단순한 방식으로 도출하는 사회 연구에서는 거의 반영되지 않습니다. 전통, 고전, 우리가 물려받은 문학과 예술의 정전을 해석하려는 역사적 연구(또는 전통적, 고전적, 정전적 관행과 단절하려는 역사적 연구)는 슐라이어마허에서 리쾨르에 이르는 해석학과 훨씬 더 잘 맞아떨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적합한 해석학의 선택
연구의 목적에 따라 적합한 해석학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사람들의 인식, 태도, 감정을 이해하려 하거나, 이를 계급, 인종, 성적 지배에 의해 형성된 문화에서 유래된 헤게모니 사회의 고질적 특성으로 문제 삼으려는 연구자들은 독서 이론가와 문학 비평가들의 해석학에서 유용한 통찰을 찾는 것이 가장 적합할 수 있습니다.
- 반면, 깊은 영적, 종교적, 역사적 또는 존재론적 함축이 울리는 연구, 특히 우리가 다른 해석 공동체와 연결되면서도 그들과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연구에서는 철학적-역사적 해석학에서 지침을 찾는 것이 유익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해석학 전통에 대한 우리의 의존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Hermeneutics as it appears in reading theory and literary criticism seems much more run-of-the-mill than the hermeneutics we encounter in Schleiermacher, Dilthey, Heidegger, Gadamer, and Ricoeur. In reading theory and literary criticism, it seems little more than a synonym for interpretation. Nor does hermeneutics seem much more than a synonym for interpretation in many contemporary instances where the term is invoked to describe the research process engaged in.
In the more philosophical and especially the more historical usage of the term, there is a certain mystique to be reckoned with. Whether we are speaking of Dilthey’s universal spiritual forms that shape social events within human history, or of Heidegger’s search for the Event that gives Being, or of Gadamer’s fusion of horizons between past and present, there seems to be a grandeur and profundity, a certain aura, about what is going on. Hermeneutics in this vein, it would seem, is not just any old attempt at interpretation.
It would not be right to put too firm a wedge between these two forms. After all, literary critics are not at all averse to citing Heidegger and Gadamer. Nevertheless, the mystique just referred to is hardly mirrored in social research that employs, say, observation and interviewing and analyzes its data by allowing major themes to emerge in quite straightforward ways. Historical research that looks to interpret tradition, the classics, and the canon of literature and art we have inherited (or, indeed, historical research that looks to break with the traditional, the classical, and the canonical) would seem to square much better with the hermeneutics stretching from Schleiermacher to Ricoeur.
Horses for Courses
Researchers looking to get a handle on people’s perceptions, attitudes, and feelings—or wanting to call these into question as endemic to a hegemonic society and inherited from a culture shaped by class, racial, and sexual dominance—may be best placed to find useful insights if they look to the hermeneutics of the reading theorists and the literary critics.
On the other hand, in research that echoes with profoundly spiritual, religious, historical, or ontological overtones, especially where we are linked to other interpretative communities in ways that both bring us close and place us at a distance, it may be profitable to seek guidance in the philosophico-historical rendering of hermeneutics.
Either way, our debt to the hermeneutic tradition is lar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