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15일의 기록
1.
작년부터 수업을 맡으며 잘 하고 있는 것이 조금 있고, 못 하고 있는 것은 매우 많지만, 그래도 모든 과목에서 일관되게 지키고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첫 시간에 한 시간 이상을 할애해서 과목 오리엔테이션 을 하는 것이다. 한 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오리엔테이션을 한다는 말은 그 만큼 과목이 '직관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2.
이러한 상황을 학생들에게 설명할 때 '아이폰 vs DSLR'의 비유를 사용하곤 한다.
아이폰의 사용법은 매우 직관적이고, 비교적 손쉽게 좋은 사진을 찍어낼 수 있다. 주로 [강의와 시험]으로 구성된 과목은 그래서 아이폰이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이 과목에서 무엇을 해야 좋은 결과물(=사진=성적)을 얻을 수 있는지 매우 직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종종 그 판단이 틀리기도 하지만).
반대로 DSLR로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일명 "매뉴얼 3회 정독"이 필요하다. 상황에 따라 렌즈를 교환해줘야 함은 물론이요, 본체에 사용자에게 온갖 디테일한 설정을 할 수 있게 권한을 부여한 광학적, 기계적 원리를 더 잘 이해하고 있을수록 좋은 결과물(=사진)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하기에 전혀 직관적이지 않고, 사용법이 복잡한 내 과목을 학생들이 이해하게 하려면 수업설명서를 제공하고, 차근차근 설명해야 하는데, 그러다보면 한 시간이 훌쩍 간다.
3.
교수자의 입장이 되기 전까지, 솔직히 말하면 나는 수업계획서 무용론자였다. 한 가지 이유는 의대에서 대부분의 과목이 '필수'이기 때문이었다. '선택과목(=과목 선택권)'이란 것이 매우 부분적으로만 존재하는 의과대학에서, 학생들이 수강하는 대부분의 과목은 개설된 다수 과목을 비교하고 선호나 필요에 따라 신청한 것이 아니라, '필수'과목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듣는 것이다. 그러니 학생 입장에서는 "굳이 강의계획서를 열심히 볼 이유가 없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교수 입장에서도 "굳이 강의계획서를 열심히 만들 이유가 없다"...라고 생각해도 된다고 여겼다.
그런데 정작 수업을 진행하고, 평가하고, 학점을 부여하는 담당교수의 입장이 되자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무엇보다 'DSLR'식 수업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사용자(=학생)의 적극적 참여가 필수불가결했고, 과목에 대해 이해도가 낮을수록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에, 수업계획서는 "수업계약서"의 성격을 갖거나, 최소한 "수업설명서"의 역할을 해야 했다.
다른 말로 하면, '아이폰'식 과목 운영을 할 것이 아니라면, 쌍방의 계약에 따라 부여되는 권한과 의무를 명확히 하지 않을 때 내가 감수해야 하는 부담과 리스크가 무척 컸다. 즉, 나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수업계획서를 자세히 써야만 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겠으면 최소한 "다양한 개별적 상황에 대해서는 학생과 담당교수의 논의를 통해서 결정할 것"이라는 말이라도 써놔야, 혹시 모를 문제상황에 대한 해결 프로세스에 학생과 교수 모두 동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초기 투자비용은 크지만, 그 만큼 실제 운영에서 발생할 리스크를 많이 줄여준다는 장점이 있다.
4.
여튼 그래서 이번 학기도 오리엔테이션용 슬라이드만 한참을 붙잡고 있다. 작년에 만들어 놓은 것이 있어서 편할 줄 알았는데, 막상 작업해보니 작년에 비해서 달라진게 너무 많아서 그렇지도 않다. 그리고 '내가 작년에 이렇게 부족했었나' 라는 부끄러움이 엄습하며, 작년 수강생들에게 너무너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사실 지금 만든 슬라이드는 되게 만족스러운데, 막상 내년에도 또 이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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