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밤, 심근경색이 있는 한 여자환자를 볼 일이 있었다. 
그녀는 술에 취해 있었고, 들것 위에서 숨을 헐떡거리며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파라메딕은 "죄송하게 되었네요"라면서 환자를 인계해주었다.
내가 물었다.  "아주머니, 가슴 통증이 있으신가요?"
그녀는 대답은 하지 않고 IV를 하려던 간호사에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야 이 XXX아, 저리 꺼져. 놔두라고 이 XXX아"
간신히 환자의 주머니를 뒤져 신분을 파악하는 도중, 
꼬깃꼬깃한 종이 한장을 발견했다. Plavix 처방전이었다.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얼마 전에 퇴원한 이 환자는 Plavix를 복용하지 않고 있었고, 그래서 혈전이 생긴 것이었다.
내가 물었다. "왜 플라빅스를 복용하지 않으셨어요?"
환자가 대답했다. "돈이 없다고!"
내가 다시 말했다. "그 약은 무료에요"
환자가 다시 대답했다. 
"버스 탈 돈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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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의학교육에 인문학을 꼭 넣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그게 꼭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뭔데?" 배워야 할 내용이 이렇게 많은데, 그 소중한 시간을 실용적이지도 않고, 주관적이고 잘 가늠되지도 않는 것을 배우는데 쓸 수는 없지. 게다가 뭐? 예술적? 무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질 때는 실용적인 목적이 있고,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가능한 것에 대해서 해야하는거야."

 

하지만 의사가 매일매일 진료를 하면서 마주하는 문제 중에서 과연 몇 퍼센트나 진정으로 "과학"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 좀 더 넓게 보자면, 우리의 보건의료 시스템에 "과학"은 도대체 얼만큼이나 영향을 미치는가? 보건의료 시스템은 다른 어떤 것들 보다도 인간의 아주 근원적인 특질을 반영한다. 젊음과 건강에 대한 갈망, 질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탐욕, 집단과 개인의 충돌,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경제적인 위계 등등.. 

 

따라서 의학에 있어 인문학을 가르친다는 것의 의의는 무엇이고, 제한된 시간에도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가지 이유는, 인문학도 과학과 같은 하나의 '도구'라는 점이다. 또한 '인문학'을 정의하기는 쉽지 않지만, '과학'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인문학은 우리가 비이성적인 존재임을 인정한다. 매번 비이성적이진 않더라도, 많은 경우에 그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과학적 경험주의(empiricism)만으로는 시야가 제한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감정이 가진 힘을 깨워낼 수 없다(ability to generate emotional power). 그러나 대중들은 아이와 같아서 논리만으로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면에서 인문학을 다루는 목적이 환자에 대한 공감능력을 높이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인문학을 가르칠 것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이러한 주장을 한다. 이들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핵심을 놓치고 있다. 의사가 되는 것은 단순히 공감을 할 줄 아는 것 그 이상이다. 사실 아무런 공감이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본 환자는 입이 거칠었고, 폭력적이었고, 비협조적이었으며, 어떤 면을 보아도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환자에 대해 공감하기 위해 거기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녀를 살려내기 위해 거기에 있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의학에서 인문학을 가르친다는 것은 감정적인 것에 취하자는 것이 아니다.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조차 공감을 하라는 것도 아니고, 의사들은 친절하게 만들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보다, 인문학은 의사와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의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하고, 통찰력을 가지고, 성찰을 하고, 궁극적으로는 그것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돕는 것이다. 집단적인 침묵은 더 이상 의사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에 재능과, 의지와, 능력을 갖추어 더 넓은 영역의 공적인 토론의 장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의학의 많은 부분들은 사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감사해하지도 않고, 기여한 사람도 불분명하고, 불확실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번 더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만이 더 좋은 의사가 될 것이며, 그리고 우리가 타인에 대해 무관심한 상황에서도 선(善)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다. 


(Acad Med. 2013 Jul;88(7):918-20. The woman in the mirror: humanities in medicine. Huyler F.)

1. 잘 가르치고 있고, 잘 하고 있다.
2. 잘 가르치지 않고 있고, 잘 하고 있다.
3. 잘 가르치고 있고, 잘 안/못 하고 있다.
4. 잘 가르치지 않고 있고, 잘 안/못 하고 있다.

 

1은 대체로는 기존의 방식을 지속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임상(진료)과 관련된 교육이 해당할 것이다. 현재 잘 하고 있으니 전반적으로는 "If it ain't broke, don't fix it" 이겠으나, 하던대로"만" 해서는 곤란하다. 취약한 부분은 지속적으로 고쳐나가고, 무엇보다 효율화 할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 그래야 2, 3, 4를 위한 공간과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2는 가르칠 가르치고 배울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면 연구에 대한 교육일 것이다. 여러 의과대학에서 학생들이 연구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공식 교육과정 내에 담고자 노력하고 있다. 문제는 이미 빽빽한 커리큘럼에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1을 축소하는 쪽으로 타협하거나, 바람직하게는 효율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3은 동력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윤리/소통/전문직업성 등 흔히 "의료인문학"이라고 뭉뚱그려지는 내용이 여기에 해당하는 예가 될 듯 하다. 수업에서 배운 교과서적인 내용이 현장에서 다르게 실천되는 모습 때문에 학습자가 너무 시니컬해지거나 혼란스러워지지 않아야 한다. 교수자는 (비록 현장의 모습이 교과서적이거나 이상적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왜 필요한지, 이론과 실천 사이에서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를 명시적으로 설명해주고, 학생 스스로도 생각해보고 서로 토론해볼 기회가 필요하다. 적어도 문제의식은 공유되고 있으니, 점진적으로 현장이 바뀌어나갈 수 있게 집단적 노력을 지속해나간다면 느리더라도 꾸준히 나아갈 수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4에 해당하는 것이 어쩌면 이번 학술대회에서 몇번이고 언급된 사회적책무나 보건의료시스템과학 같은 분야가 아닐까 싶다. "잘 안/못 하고 있다"라고 썼지만, 안 하는 것인지, 못 하는 것인지, 다른 방식으로 하고 있는 것인지를 먼저 생각해볼 일이다.

 

이런 분야는 어떻게 접근하는게 좋을까? 문제제기도 좋고, 새로운 시도도 좋지만, 쉽게 동의되지 않는 것은 "의과대학 교육"에 넣음으로써 해결하려는 접근이다. 다행히도(?) 애시당초 의대 교육은 잘 바뀌지도 않는다. 어차피 한정된 지원이라면 학생부터 가르치려는 상향식보다는 현장부터 바꿔나가려는 하향식 접근이 낫지 않을까. "Children have never been very good at listening to their elders, but they have never failed to imitate them."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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