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의사>
1. 어떤 의사가 있다. 이 의사는 매달 X라는 질병을 가진 환자 100명을 본다. 그런데 이 의사의 고용계약에는 진료 성과에 대한 특이한 조건이 하나 붙어있다. 바로 "모든 100명의 환자가 다 나으면 안 된다"이다. 

 

심지어는 구체적으로 몇 명만 낫게 해야하는지의 비율도 정해져 있다. 다 잘 나은 환자는 반드시 100명중에 40명 이내여야 하고, 30명은 적당히 나아야 하며, 30명은 좀 계속 아파야 한다. 오히려 몇 명의 상태가 더 나빠지는건 (적어도 이 의사에게는) 괜찮다. 

 

그래서 이 의사는 의도적으로 30명쯤 아픈 환자가 유지되도록 한다. 또한 다 나은 사람이 40명이 넘지 않도록 매우 신경을 쓴다. 40명이 넘으면 가끔은 검사 수치를 조금 손대기도 한다. 당연히 나쁜쪽으로. 만약 최선의 진료를 하다가 자칫 100명이 다 낫기라도 하면 매우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어떤 교수>

2. 여기서 의사를 교수로, X라는 질병은 X라는 과목으로, 환자는 학생으로, 다 나은 것을 A학점으로, 적당히 나은 것을 B학점으로, 계속 아픈 상태를 C학점, 검사 수치를 원점수(성적)로 바꾸면, 상대평가에서 학점을 부여해야 하는 교수가 처한 입장이 된다. 

 

어제 본1 수업에서 한 시간 동안 자율적으로 오픈북 과제를 하는데(심지어 교수에게 답안을 작성하여 이게 맞게 한거냐고 물어봐도 됨), 그 시간동안 "질문하지(즉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학생들이 상당수 있음"에 내심 안도하고 있는 스스로를 보며 이 이상한 비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1
"시스템을 가장 취약한 사람(the most vulnerable)에게 이익이 돌아갈 수 있도록 재설계한다면, 그 분류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이익이 돌아간다. 하지만 반대방향으로는 작동하지 않는다." <ICRE2021 중> 
 
2
"많은 경우, 학업위기 학생은 일단 유급을 당하고, 개입은 사후적으로 시작된다. 이런 방식을 '결핍-반응(deficit-reactive) 접근'이라고 한다. 유급이라는 '결핍'을 채워주고자, 다음 번엔 통과할 수 있도록 시험을 보고, 재시험을 본다. 하지만 이러한 개입은 학생에게 낙인이 될 수 있으며, 더 큰 문제는 유급으로 이어진 진짜 핵심적인 원인은 놓친다는 것이다. 또한 정작 의과대학생이 한 명의 의사로 성장해나가는 데 필요한 서포트는 제공되지 못하고, 결국 재차, 삼차 유급을 겪곤 한다. 학업위기 학생에 대한 개입은 선제적-적극적-발달적이어야 한다" <Kebaetse MB et al., 2017>
3
"이 과목의 평가는 Pass/Fail로 바꾸었으면 합니다. Grade 중심의 평가가 가지고 있는 결정적인 한계 때문입니다. 그건 바로 교수자 입장에서 성취도가 낮은 학생에게 개선을 위한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주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한 가지 이유는 학생의 입장에, 다른 한 가지 이유는 교수의 입장에 있습니다.
 
학생 입장에서는 (요즘 그토록 중요시되는) '공정성'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00명의 학생 중, 성취도가 낮은 10명의 학생에게만 피드백을 준다는 말은, 반대로 이야기하면 90명의 학생에게는 피드백을 주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교수자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졌더라도, 성적이 상대평가 방식으로 산출되는 한, 일부 학생에게만 피드백이라는 ‘호의’를 베푸는 것은, 피드백을 받지 못한 다른 대부분의 학생에게 상대적으로 ‘손해’를 입히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교수자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학생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공정성’을 지키기 위해서 그 학생들이 그대로 낮은 수준에 머무는 것을 방치하게 됩니다. 적어도 저는 그랬습니다. 이는 의지가 없거나 게을러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학생들이 그토록 요구하는) 평가의 ‘공정성’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피드백을 주지 않음으로써 교수도 이득이 얻습니다. '변별력'의 확보가 그것입니다. Grade 방식의 평가에서 교수자는 성취도가 낮은 학생에게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역설적으로 평가의 변별력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Pass-Fail 방식으로 평가가 바뀌어야만, 교수자는 성취도가 낮은 학생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모든 학생이 일정 수준 이상의 성취도를 달성하게끔 지도할 명분과 목표가 생깁니다.
 
이는 ‘모든 의과대학 졸업생에게 최소 수준 이상의 역량을 요구’하는 역량바탕의학교육(Competency-based Medical Education)이라는 전 세계적인 의학교육의 흐름에도 부합하는 것입니다." <환자-의사-사회 과목의 Pass/Fail 변경을 건의하며 썼던 글을 약간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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