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학생을 가르칩니다.

환자-의사-사회 과목을 마무리하며 (2020년 12월 23일의 기록)

Meded. 2021. 12. 23. 05:47

1. 학기말은 긴장된다. 학생은 성적을 받고, 교수는 강의평가를 받는다.

 

2. 강의평가가 학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는 무수한 연구결과를 알아도 이 긴장은 여전하다. 오히려 그래서 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3. 나도 학생 때 과목에 불만이 많았었나 싶다. 가끔 과거의 오늘에 10년전에 쓴 포스팅을 보면 그렇다.

 

4. 수업을 마치고 나면 학생들의 반응이 너무너무 궁금하다. 늘 호평과 악평이 뒤섞여 있는데, 그러니까 반드시 악평도 있는데, 이럴 걸 알면서도 궁금해하는 내 모습을 보면 약간 병적이다 싶은 생각도 든다. 

 

5. 환자-의사-사회1 과목에는 학사시스템상 공식적으로 이뤄지는 강의평가가 없다. 다른 과목은 다 있는데, 여기만 없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알고보니 없어진 맥락이 있었다. 문제는 이 결정은 마치 “해경을 해체한다.” 류의 결정이었다는 점. 

 

6. 그래서 어쩔수없이(?) 구글설문(익명)으로 비공식 강의평가를 만들어서 받아보았다. 괜히 했나 싶다(….)

 

7. 익명성은 장벽을 낮춘다. 문제는 호평에 대한 장벽과 혹평에 대한 장벽을 모두 낮추는데, 보통 혹평의 절대값(?)이 더 크다. 그래봤자 연예기사에 달리는 악플에 비하면 완전 '순한 맛'일텐데, 연예인들은 참 대단하다. 

 

8. 예전에도 한 번 쓴 적이 있는데, 아직 내가 고수하는 과목 운영 방식은 널널한, 그러니까 학생 입장에서는 개꿀(!)인 과목보다는, 조금 힘들어도 뭐든 배웠으면 하는 과목이다. 여기서 1차 충돌.   

 

9. 문제의 한 가지 원인은 모든 과목이 필수과목인 의대 교육과정이다. 수업의 내용도, 방식도, 교수도 잘 맞지 않는데, 억지로 들어야 하는 과목이 있다. 환자-의사-사회는 그렇게 취향과 호불호가 갈리는 과목 중 하나다. 여기서 2차 충돌. 


10. 그리고 다는 아니지만, 당연히 어떤 학생들은 개꿀! 과목을 선호한다. 여기서 3차 충돌 

 

11. 의학지식 전달이 중심인 대부분의 과목과 달리, 환자-의사-사회 류의 의료인문학(인문사회의학) 과목에서는 객관식 시험의 비중을 높이기가 어렵다. 결국 흔히 택하는 방식이 ‘글쓰기’인데, 글을 쓰는 것 자체에 대한 부담+거부감, 학생의 워딩을 빌리자면 “명확하지 않은” 평가기준에 대한 거부감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아, 동료평가에 대한 거부감도 상당하다. 여기서 4차 충돌. 

 

12. 그놈의 ‘공정성’은 또 하나의 장벽이다. 평가의 신뢰도를 높이려면 평가 상황, 평가 방법, 평가 횟수를 늘려야 한다. 무엇보다 모든 평가방법은 불완전하다. 따라서 학생에 대한 정확한 “그림”을 얻으려면 다양한 방법을 조합해야 한다. 문제는 의대에서는 객관식시험이 평가의 gold standard이자 magic bullet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평가의 신뢰도를 높이려는 여러 노력은 학생들이 선호와 배치되고, 현실적으로 교수의 부담도 무척 늘어난다. 여기서 5차 충돌.   

 

13. 결국 의료인문학 과목의 취지에 맞춰서 나름대로 뭔가 학생들에게 하게끔 하고, 요구할수록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그게 싫으면 가급적 뭔가 새로운 시도도, 익숙하지 않은 평가도 안 하면 된다. 문제는 아직 내가 기력(?)이 남아있는지, 자꾸 뭔가를 시도한다. 여기서 6차 충돌. 

 

14. 의과대학 교육과정이 여러 개의 톱니바퀴로 된 기계라면, 가운데 하나의 톱니바퀴만 바꿔봐야 거기에 물려있는 다른 톱니바퀴와 어긋날 뿐이다. 이 기계를 바꾸려면 하나의 톱니바퀴만 바꿔서는 안되고, 거기에 물린 다른 것들과의 조화를 고려하거나, 다른 것들을 함께 바꾸어야 한다. 

 

15. 따라서 내가 과목을 운영한 방식은 최선이 아니었을 뿐더러, 설령 최선이었다고 해도 이 조직과 조직구성원이 품고 있는 문제를 내가 다 감싸안으려고 할 필요는 없다(라고 다짐한다). 당연히 그럴 수도 없다.  

 

16. 결국 혼자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팀으로 해야 한다. 그런데, 팀…어떻게 구성하지? 

 

17. 가능하다면 P/F로 운영하고 싶다. 적절한 기준을 설정하고, 미리 그 기준을 넘긴 학생은 한 학기가 마무리되기 전에 Pass를 받고, 남은 기간을 다른 공부에 매진하고, 기준을 넘기기 어려워하는 학생에게만 집중적으로 피드백을 제공하고 싶다. 하지만 P/F가 학칙 상 가능할까? 혹은 학생은 원할까? 

 

18. 만약 의학교육학을 공부하지 않았으면, 이걸 전공하지 않았으면, 모른다는 핑계로라도 안 하고 못 해도 마음이 덜 불편할텐데, 뻔히 바람직한 방식을 알면서 하지 않는 것은 자기기만이자 무책임인 것 같아 괴롭다.  

 

19. 이번 학기에 과목에서 피드백을 주기 위해서 익명으로 운영되는 ‘오픈채팅방’을 운영해봤고, 마지막에 익명으로 ‘강의평가’를 받아 보았는데, 종종 선을 넘는 경우도 있고, 그 때마다 멘탈에 자꾸 충격이 가해져서 이걸 유지해야하나 하는 고민이 많이 된다. 학교에서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20. 사실 혹평 말고도, 호평에 더하여 ‘선을 넘는’ 동기들의 발언에 타격입을 내 멘탈까지 걱정해주는 학생들의 응원도 있다. 사실 제법 많고, 누군지 몰라 말은 못했지만 무척이나 고맙다. 19번이 고민되는 것도 이런 학생들 때문이다. 그래도 아직은 학생을 믿어야 하나…라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는 것 보면, 매운 맛을 덜 봤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