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Eval Clin Pract. 2006 Jun;12(3):248-56. doi: 10.1111/j.1365-2753.2004.00551.x.

Integrating evidence into clinical practice: an alternative to evidence-based approaches 

 

 

"근거(evidence)"만으로는 부족하다 — 임상 의사결정의 또 다른 길

Tonelli MR. (2006). Integrating evidence into clinical practice: an alternative to evidence-based approaches. Journal of Evaluation in Clinical Practice, 12(3), 248–256.


안녕하세요. 오늘은 EBM(evidence-based medicine, 근거중심의학)을 공부하다 보면 한 번쯤은 마주치게 되는 고전적인 비판 논문 하나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워싱턴 대학의 호흡기·중환자의학 전문의이자 의료윤리학자인 Mark Tonelli가 2006년에 쓴 글인데요,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읽어도 여전히 날카롭습니다. 🩺

 

특히 요즘처럼 "그래서 근거가 뭐예요?"라는 질문이 임상의 모든 순간을 지배하는 시대에, 이 논문이 던지는 질문은 묵직합니다.

근거(evidence)는 정말 항상 최우선일까요? 


🤔 EBM의 불편한 진실: "통합"이라는 말의 빈틈

EBM은 처음 등장할 때부터 분명한 선언으로 시작했습니다. 임상 연구에서 나온 경험적 근거(empirical evidence)가 임상 경험(clinical experience), 전문가 의견(expert opinion), 병태생리학적 추론(pathophysiologic rationale)보다 우월하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개별 환자한테 인구집단 연구 결과를 그대로 적용하는 게 말이 되냐"는 비판이 쏟아지자, EBM 진영은 슬그머니 표현을 바꿉니다. '비근거적(non-evidentiary)' 지식을 '경시(de-emphasize)'한다고 하던 것을, 이제는 다양한 지식을 '통합(integration)'한다고 말하기 시작한 거죠.

 

여기서 Tonelli가 짚는 핵심 문제가 나옵니다. 만약 임상 경험이나 병태생리학적 추론을 경험적 근거와 동등하게 인정한다면, "임상 연구 근거가 최선의 근거"라는 EBM의 제1공리가 무너집니다. 그렇다고 무시하자니 비판을 피할 수 없고요.

 

그래서 EBM이 택한 묘수가 바로 — 예전엔 '비근거적'이라고 불렀던 임상 경험과 생리학적 이해를, 이제 와서 '근거(evidence)'라는 우산 아래로 끌어들이는 것이었습니다. 단, 종류(kind)가 아니라 정도(degree)의 차이일 뿐이라고요. 그래서 근거 위계(hierarchy of evidence)의 맨 아래 칸에 슬쩍 끼워 넣습니다.


⚖️ 정도(degree)의 차이가 아니라 종류(kind)의 차이다

Tonelli의 반박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그는 이 "근거로 묶어버리기" 시도가 철학적으로 틀렸다고 봅니다.

 

EBM 진영조차 임상 경험과 전문가 의견을, 생리학적 이해와 직관(intuition)을 구분하면서 후자들을 '근거'에서 명시적으로 배제하잖아요? 그렇다면 임상 경험·생리학적 이해·경험적 근거에는 다른 것들에는 없는 어떤 공통점이 있어야 하는데, 사실 이 셋은 본질적으로 꽤 다릅니다.

"임상 경험은 직접적이고 개인적이지만, 경험적 근거는 간접적이고 일반적이다."

"The former is direct and personal, the latter indirect and general."

 

즉 이들은 종류가 다른(different in kind) 지식인데, EBM은 이를 마치 같은 종류 안에서 질만 다른(different in degree) 것처럼 다룬다는 거죠. 이게 이 논문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논점입니다.

 

논문 초록에 나오는 핵심 주장을 그대로 옮겨보면 이렇습니다.

"모든 EBM 접근법에서 임상 연구로부터 도출된 경험적 근거에 일반적인 우선권을 부여하는 것은 인식론적으로 옹호될 수 없다."

"The general priority given to empirical evidence derived from clinical research in all EBM approaches is not epistemically tenable."


🧩 그렇다면 대안은? — 사례 기반(casuistic) 접근

Tonelli가 제시하는 대안은 의료윤리에서 빌려온 결의론적(casuistic), 즉 사례 기반 접근입니다. Jonsen과 Toulmin이 The Abuse of Casuistry에서 임상의학을 '실천적(practical) 활동'의 대표 사례로 든 것에서 출발하죠. 임상 의사결정에는 이론적 지식이나 술기뿐 아니라 프로네시스(phronesis), 즉 실천적 지혜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이 모델에서 임상 의사결정에 관련된 주제(topic)는 다섯 가지입니다. 👇

주제 (Topic) 내용
경험적 근거 (Empirical evidence) 임상 연구에서 도출
경험적(체험적) 근거 (Experiential evidence) 본인 또는 타인(전문가 의견 포함)의 임상 경험
병태생리학적 추론 (Pathophysiologic rationale) 생리·질병·치유에 대한 이론
환자의 가치와 선호 (Patient values and preferences) 개별 환자와의 상호작용
시스템 요인 (System features) 자원 가용성, 사회·전문직 가치, 법적·문화적 고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 어떤 주제도 다른 주제에 대해 일반적인 우선권을 갖지 않습니다.

"어떤 단일 주제도 다른 주제에 대해 일반적인 우선권을 갖지 않으며, 한 주제의 상대적 중요성은 개별 사례의 정황에 달려 있다."

"No single topic has a general priority over any other and the relative importance of a topic will depend upon the circumstances of the particular case."

 

각 주제 안에서는 위계를 만들 수 있어요(예: 경험적 근거 내부의 RCT > 관찰연구). 하지만 주제와 주제 사이에서는 고정된 순위가 없다는 게 핵심입니다. 어떤 사례에서는 환자의 가치가, 어떤 사례에서는 병태생리가 결정적일 수 있는 거죠.


💉 임상 현장의 예시들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으니, 논문이 든 예시를 볼까요.

  • 저일회호흡량 환기(low tidal volume ventilation): ARDS에서 사망률을 줄인다는 강력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런데 눈앞의 환자가 그에 따른 산증(acidosis)으로 심부정맥(cardiac arrhythmia) 같은 부작용을 보인다면? 근거를 따르되 개별 환자에겐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는 셈이 됩니다.
  • 심근경색 후 베타차단제(beta-blocker): 생존율을 높인다는 걸 환자도 압니다. 그런데 발기부전(impotence) 부작용 때문에 거부한다면? 여기선 환자의 가치가 근거를 압도합니다.
  • 응급 혈관성형술(angioplasty): 아무리 근거가 좋아도, 시술실과 중재시술 심장전문의가 없는 병원에선 실현 불가능합니다. 시스템 요인이 결정적인 경우죠.

이 모든 상황에서 숙련된 임상의가 하는 일은 결국, 서로 충돌할 수 있는 여러 근거를 저울질(weigh)하는 것입니다.


📊 "근거 그 자체"를 쓰는 방식도 사실은 결의론적이다

이 논문에서 제가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인데요. Tonelli는 한 발 더 나아갑니다. 다른 지식과의 관계뿐 아니라, 경험적 근거를 그 자체로 적용하는 과정마저도 실은 사례 기반 추론이라는 겁니다.

 

RCT는 보편적이고 일반화 가능한 진리를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특정 조건에서 특정 인구집단의 치료 효과를 보고할 뿐이죠. 그래서 임상 연구는 우리에게 일종의 합성된 '평균 환자(average patient)'라는 패러다임 사례(paradigmatic case)를 제공합니다.

 

임상의의 일은 눈앞의 환자(patient-at-hand)가 이 '평균 환자'와 얼마나 닮았는지를 유추(analogy)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충분히 닮았으면 연구 결론을 적용하고, 중요한 차이가 있으면 그 결론이 이 환자에겐 맞지 않을 수 있다고 보는 거죠. EBM 진영도 중요하다고 인정하는 이 작업이, Tonelli가 보기엔 본질적으로 결의론적이라는 겁니다.


🎓 의학교육에 주는 함의

저처럼 의학교육에 몸담은 사람에게 이 논문이 특히 의미 있게 다가오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Tonelli는 두 가지 함의를 짚습니다.

  • 첫째, 임상 연구를 개발·습득·비판적으로 평가(critical appraisal)하는 능력만 가르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자칫하면 통계와 논문 해석에는 능하지만, 근거적·비근거적 warrant(논거) 사이를 협상하는 복잡한 판단 능력은 키우지 못한 세대를 길러낼 위험이 있다는 거죠.
  • 둘째, 임상 의사결정은 개인적이고 실천적인(personal and prudential) 활동이기 때문에, 같은 사례에서도 임상의마다 다른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건 EBM이 내세운 "진료 변이(practice variability) 줄이기"라는 목표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점이에요.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경고. EBM이 모든 종류의 의학 지식을 고려하도록 허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장려해야 한다면서,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근거'에 기반한 새로운 독단적 의학 권위를 만들어낼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다."

"To do less is to risk creating a new dogmatic kind of medical authority, one based on 'the evidence'."


✍️ 마치며 — EBM을 버리자는 게 아닙니다

오해하면 안 되는 게, Tonelli는 결코 EBM을 폐기하자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결의론적 접근이 EBM의 핵심 가치 — 엄밀하고 명시적인(rigorous and explicit) 추론 — 을 그대로 끌어안는다고 강조합니다.

 

오히려 이 모델의 장점은, 임상의들 사이의 의견 차이를 "그냥 스타일이나 취향 차이"로 뭉뚱그리지 않고, 어떤 warrant에 얼마만큼의 무게를 두었는지의 차이로 명확히 추적할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있습니다. 진료 변이의 근본 원인을 드러내고 공개적으로 토론할 수 있게 되는 거죠. 교육적으로도 훨씬 정직한 접근입니다.

 

논문의 결론을 옮기며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러한 지식(임상 연구)을 개별 임상 의사결정에서 처방적인 것으로 보려는 시도는 오류이다."

"...attempts to view such knowledge as prescriptive in individual clinical decision making is in error."

 

결국 좋은 임상의란, 근거를 무시하는 사람도 아니고 근거에 맹종하는 사람도 아니라, 경험적 근거·체험적 근거·병태생리·환자의 가치·시스템이라는 다섯 개의 저울추눈앞의 이 환자를 위해 신중하게 다는 사람이라는 것. 20년 전 글이지만, AI가 "근거"를 실시간으로 들이미는 오늘날 오히려 더 곱씹어볼 만한 통찰이 아닐까 싶습니다. 🤖

 


서론(Introduction) 

근거중심의학(evidence-based medicine, EBM)은 의학교육과 임상실무의 “새로운 패러다임(new paradigm)”으로 옹호되어 왔다(The Evidence-Based Medicine Working Group 1992). EBM의 영향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곳은 학문적 의료기관(academic medical centre)이다. EBM 옹호자들은 전공의 수련(residency training)의 형성기 동안 EBM을 학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속적으로 강조해 왔다(Rosenberg & Sackett 1996). EBM 교육이 의학교육의 질이나 이후 환자진료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좋은 근거는 부족하지만(Parkes et al. 2001; Hatala & Guyatt 2002), 현재 미국 내 대다수 내과 수련 프로그램은 전공의 수련 과정에 EBM의 일부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3분의 1은 독립적인 EBM 교육과정(free standing curriculum in EBM)을 가지고 있다(Green 2000). 다른 전공의 수련 프로그램들도 EBM을 교육과정에 받아들였다(Green 1999). 졸업후 의학교육(graduate medical education)에 EBM이 이처럼 광범위하게 도입되면 다음 세대 의사들이 임상의학(clinical medicine)을 실천하는 방식을 바꾸게 될 가능성이 크지만, 그러한 변화가 궁극적으로 환자에게 이익이 될지는 분명하지 않다.

 

EBM 문헌의 대부분은 임상연구 결과를 개발하고, 획득하고, 해석하며, 임상실무에 통합하는 실제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EBM은 의학지식의 본성에 관한 특정한 철학적 가정(philosophical assumptions)과 논증 위에 서 있으며, 이러한 가정과 논증은 충분히 명료하게 밝혀지지 않았다(Miles et al. 2004). EBM 지지자들은 이제 다양한 종류의 의학적·비의학적 지식을 통합할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그러한 통합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흥미롭게도, 근거를 임상적 의사결정에 적용하는 이 부분은 EBM 교육과정에서 가장 다루어질 가능성이 낮은 요소이기도 하다(Green 2000). 임상의가 출판된 임상연구뿐 아니라 개인적 경험, 질병에 대한 병태생리학적 이해, 개별 환자의 선호 또는 다른 “비근거적(non-evidentiary)” 출처에서 나오는, 서로 충돌할 수 있는 행위의 정당화 근거들을 어떤 과정으로 균형 잡아야 하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여기서 나는, 지금까지 EBM 지지자들이 다양한 종류의 의학지식과 추론을 임상적 의사결정에 통합하는 방법을 설명하려고 했던 몇 안 되는 시도들이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EBM 접근법의 실패는 의학적 의사결정의 서로 다른 잠재적 정당화 근거들, 예컨대 실증적 근거(empiric evidence), 임상경험(clinical experience), 병태생리학적 논거(pathophysiologic rationale)를 종류의 차이(different in kind)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different in degree)로 다루려 한 데서 비롯된다. 이러한 이해 아래에서는 하나의 의학지식 형태, 구체적으로는 임상연구에서 도출된 지식이 다른 지식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이러한 접근이 철학적으로 유지될 수 없으며, 의학적 의사결정의 여러 잠재적 정당화 근거들은 서로 종류가 다르다고 주장할 것이다. 의학지식의 본성을 이렇게 이해하면, 다양한 정당화 근거를 특정 의학적 결정 안으로 통합하는 대안적 방법이 필요하다. 그 방법은 Jonsen과 동료들이 제시한 의학윤리의 사례주의적, 또는 사례기반 접근(casuistic, or case-based, approach)과 매우 유사하다(Jonsen et al. 1992). 궁극적으로, 의학적 인식론(medical epistemology)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많은 임상의들이 바라는 보다 “상식적인(common-sense)” 의학 실천을 명시적으로 방어할 수 있게 해준다(Porta 2004).


근거의 통합: EBM 접근법 Integrating the evidence: EBM approaches 

EBM은 처음부터 임상적 의사결정의 근거로서 다른 종류의 의학지식, 구체적으로 개인적 임상경험(individual clinical experience), 전문가 의견(expert opinion), 병태생리학적 논거(pathophysiologic rationale)보다 실증적 근거(empirical evidence), 즉 공식적이고 체계적인 임상연구(formal and systematic clinical research)에서 도출된 근거를 명확하고 분명하게 선호한다고 밝혔다(The Evidence-Based Medicine Working Group 1992). “비근거적(non-evidentiary)” 종류의 지식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충분한 근거의 부족(the dearth of adequate evidence)”이 있을 때에만 유용한 것으로 간주되었다(The Evidence-Based Medicine Working Group 1992).

 

실증적 근거에 일반적 우선권을 부여한다는 생각은 의사들과 여러 논평자들에 의해 도전받았다. 이들 중 많은 사람은 집단 연구(population studies)에서 얻은 지식을 개별 환자 진료에 적용하려 할 때 내재적 한계가 있음을 지적했다(Tanenbaum 1993; Tanenbaum 1994; Horwitz 1996; Feinstein & Horwitz 1997). 이러한 비판에 대한 반응으로 EBM 지지자들은 이후 의미론적 전환(semantic switch)을 보였다. EBM은 “비근거적” 종류의 의학지식을 “덜 강조(de-emphasizing)”하기보다는, 일부 대안적 의학지식과 환자의 목표 및 가치를 임상적 의사결정에 “통합(integration)”해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Sackett et al. 1996). EBM이 도입된 이후 10년 동안 이 접근법은 진화해 왔다. 대안적 종류의 의학지식을 통합하자는 초기의 요청은 개인적 임상경험(personal clinical experience)에 초점을 두었는데(Sackett 1997), 우연이 아니게도 임상가들이 EBM에 대해 제기한 주된 반대는 바로 임상경험의 가치가 낮게 평가된다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근거와 임상경험을 실제로 어떻게 통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것이 “양심적이고 명시적이며 신중한(conscientious, explicit and judicious)”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 외에는 거의 제시되지 않았다(Sackett 1997). 이후 일부 학자들은 병태생리학적 논거(pathophysiologic rationale)를 근거와 통합해야 할 비근거적 종류의 의학지식 목록에 추가했다(Ellrodt et al. 1997). 주목할 점은, 임상적 의사결정의 근거로서 전문가 의견(expert opinion)은 이와 같은 방식의 회복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Tonelli 1999). 이러한 초기 관점 확대의 전 과정에서 EBM은 임상경험과 병태생리학적 논거를 실증적 근거와 종류가 다른 것으로 인식했다(Canadian Task Force on the Periodic Health Examination 1979; Hadorn et al. 1996).

 

그러나 대안적 종류의 의학지식이 갖는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EBM에 문제를 제기한다. 비근거적 형태의 의학지식에 실증적 근거와 동등한 지위가 부여된다면, 임상적 의사결정을 안내하는 “최선의 근거(best evidence)”로 연구에서 도출된 근거를 식별하는 EBM의 핵심 공리(primary axiom)가 약화된다. 다시 말해, 비근거적 지식이 실증적 근거를 압도할 수 있다면, 특정 질환과 관련된 임상연구를 알고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그 실증적 근거가 지지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 질환을 가진 환자를 치료하기로 선택한 임상의도 여전히 자신이 “EBM”을 실천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임상경험을 양심적이고 명시적이며 신중한 방식으로 통합하고 있고, 우연히 그 경험에 우선권을 부여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EBM이 임상실무에 대한 매우 다른 접근법을 취하면서도 누구나 충성을 주장할 수 있는 의미 없는 명칭이 되는 것을 피하려면, 적어도 특정한 비근거적 형태의 의학지식이 임상실무에 어느 정도 가치를 갖는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실증적 근거 사용에 대한 일반적 선호를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가장 최근의 시도는 이전에는 비근거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던 의학지식의 종류를 “근거(evidence)”라는 우산 아래로 포섭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개인적 임상경험(personal clinical experience)과 생리학적 이해(physiologic understanding)는 현재 일부 EBM 지지자들에 의해, 임상연구에서 도출된 실증적 근거와 종류가 아니라 정도에서만 다른 의학적 “근거”의 형태로 정의되고 있다(Guyatt & Rennie 2002). 이러한 인식론적 전환(epistemic shift)은 EBM의 공식적 도입 이후 제시되어 온 근거 위계(hierarchies of evidence)의 변화에서 분명히 드러난다(Table 1). 임상경험과 생리학적 이해를 “근거”의 형태로 분류함으로써 EBM은 두 가지 주장을 할 수 있게 된다.

  • 첫째, 임상연구에서 도출된 실증적 근거가 없을 때 임상경험이나 생리학적 추론에 의존해 임상적 결정을 내리는 의사도 여전히 EBM을 실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더 중요하게는, 임상경험과 생리학적 이해를 근거의 형태로 분류함으로써, EBM 지지자들은 임상연구에서 도출된 근거를 경험적 또는 생리학적 “근거”보다 더 높은 위치에 놓는 근거 위계를 구성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EBM은 이전에는 비근거적 종류의 지식으로 보았던 것들의 일정한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최선의 근거”로서 실증적 근거에 대한 일반적 우선권을 유지한다. 이 위계는 특히 질 높은 실증적 근거가 있을 경우, 그것이 임상경험이나 생리학적 이해를 임상적 결정에서 고려할 필요를 없앨 만큼 설득력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함을 함축한다.


Table 1. 근거중심의학에서 근거 위계 또는 근거 수준의 변화 
Evolution of hierarchies or levels of evidence in evidence-based medicine 

초기 위계(Early hierarchy) 현재 위계(Current hierarchy)
1. 잘 수행된 무작위대조시험(well-conducted randomized controlled trials) 1. N-of-1 무작위대조시험(N-of-1 randomized controlled trial)
2. 잘 수행된 코호트 연구 또는 환자-대조군 연구, 즉 관찰연구(well-conducted cohort studies or case-control study; observational studies) 2. 무작위시험의 체계적 문헌고찰(systematic review of randomized trials)
3. 통제가 부실하거나 통제되지 않은 연구(poorly controlled or uncontrolled studies) 3. 단일 무작위시험(single randomized trial)
4. 전문가 의견(expert opinion) 4. 관찰연구의 체계적 문헌고찰(systematic review of observational studies)
  5. 단일 관찰연구(single observational study)
  6. 생리학 연구(physiologic studies)
  7. 비체계적 임상관찰(unsystematic clinical observation)

초기 위계는 Canadian Task Force (1979)와 Hadorn et al. (1996)을 각색한 것이다.
현재 위계는 Guyatt & Rennie (2002)를 각색한 것이다.

초기 위계에서는 개인적 임상경험(personal clinical experience)병태생리학적 추론(pathophysiologic reasoning)이 “근거(evidence)” 범주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현재 위계에서는 생리학(physiology)과 임상경험(clinical experience)이 “근거(evidence)” 범주에 추가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전문가 의견(expert opinion)은 더 이상 “근거”로 간주되지 않는다.


물론 임상경험과 생리학적 이해를 “근거”라는 우산 아래에 포함하기로 한 결정과, 이어서 이러한 종류의 지식을 근거 위계의 낮은 단계에 배치한 결정은 그 자체로 근거중심적(evidence-based)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철학적, 더 정확히는 인식론적 주장(epistemological assertions)이다. 나는 두 주장 모두 잘못되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 첫째, 임상경험과 생리학적 이해를 “근거”로 분류하려는 최근의 시도는, 이러한 종류의 지식이 임상연구에서 도출된 근거와 충분히 유사하여 하나의 인식론적 범주(epistemic heading) 아래에 포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오류를 범한다. 다양한 종류의 지식이 공유하는 것은 임상적 결정의 정당화 근거로 작용할 잠재력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각각을 “근거”의 한 종류라고 주장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모든 의학적 결정의 정당화 근거가 근거를 구성한다는 순환논증(circular argument)을 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러나 EBM 지지자들은 그러한 주장을 방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임상경험과 전문가 의견, 그리고 생리학적 이해와 직관(intuition)을 명확히 구분하며, 전문가 의견과 직관이 특정 의학적 결정의 정당화 근거로 작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근거”의 영역에서 명시적으로 배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EBM 지지자들은 임상경험, 생리학적 이해, 실증적 근거가 전문가 의견 같은 배제된 잠재적 정당화 근거에는 없는 어떤 중요한 특징을 공유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 그러나 임상경험임상연구에서 도출된 근거와 상당히 달라 보인다. 전자는 직접적이고 개인적(direct and personal)인 반면, 후자는 간접적이고 일반적(indirect and general)이다. 실제로 직접적이고 일차적인 경험(first-hand, primary experience)체계적 관찰 및 실험에서 도출된 실증적 근거, 즉 Reed가 “가공된 정보(processed information)”라고 부른 것 사이에는 고전적인 철학적 구분이 존재한다(Reed 1996). 사실 이 구분은 EBM의 우월성을 주장했던 초기 주장들의 핵심이었다(The Evidence-Based Medicine Working Group 1992). “근거” 개념이 이렇게 포괄적으로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 마찬가지로 생리학적 이해를 “근거”의 한 종류로 포함하는 것도 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 EBM 지지자들이 생리학적 이해의 포함을 인간이나 동물에서 수행된 특정 생리학 실험, 즉 임상적 결과지표(clinical outcome measures)를 제공하지 않는 실험에서 도출된 근거로 제한한다면, 그 주장은 일관되고 설득력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사들은 특정 임상적 결정을 방어할 때, 특정 임상시험을 인용하듯 특정 생리학 연구를 일반적으로 인용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생리학적 원리(physiologic principles)로부터 논증한다. 즉 특정 실험 자체가 아니라, 실험에서 도출된 이론(theories)으로부터 논증한다. 생리학적 원리로부터 추론하는 것은 의학에서의 합리주의(rationalism)의 한 형태를 나타내며, 바로 이 개념은 지난 두 세기 동안 점점 더 강하게 거부되어 왔다. EBM이라는 새로운 경험주의(new empiricism)는 다시 말해, 이러한 추론 방식에서 비롯된 오류들을 인식하면서 합리주의를 명시적으로 거부하는 데 기반을 두었다. 그럼에도 이론에 대한 의존은 임상의학에서 여전히 중요하며, 우리가 실증적 근거를 해석하고 가치평가하는 방식에 정당하게 영향을 미친다(Vandenbroucke & de Craen 2001).

 

임상경험, 생리학적 이해, 실증적 근거가 모두 “근거”의 한 종류로 간주될 만큼 충분히 유사하다고 인정하더라도, 임상연구에서 도출된 실증적 근거가 존재할 때 그것이 항상 임상적 의사결정을 안내하는 “더 나은 근거(better evidence)”를 제공한다는 주장은 잘못이다. 각각의 잠재적 의학지식 출처는 서로 다른 강점과 약점의 조합을 지닌다.

 

  • EBM 지지자들은 임상경험생리학적 추론에 의존하여 의학적 의사결정을 내릴 때의 한계를 명확히 제시해 왔고(The Evidence-Based Medicine Working Group 1992; Sackett & Rosenberg 1995),
  • 비판자들은 실증적 근거를 특정 환자 진료에 적용할 때의 내재적 한계를 지적해 왔다(Feinstein & Horwitz 1997; Tonelli 1998; Tanenbaum 1999).
  • 임상경험 및 병태생리학적 논거는 때때로 출판된 실증적 근거로부터 도출된 최적 진료(optimal care)에 관한 결론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낮은 일회호흡량 환기(low tidal volume ventilation)는 급성호흡곤란증후군(acute respiratory distress syndrome, ARDS)으로 인한 호흡부전에서 안전하며 생존율을 향상시키는 것으로 입증되었다(ARDS Network 2000). 그러나 개별 환자는 이 치료와 관련된 산증(acidosis)에 대해, 해당 연구에서는 기술되지 않은 심장부정맥(cardiac arrhythmia) 같은 부정적 생리학적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임상의는 이러한 개별적 이상 반응을 무시하고 사망률을 낮추는 것으로 입증된 치료를 계속 제공하기로 선택할 수 있지만, 이 경우 그는 개별 환자에게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임상경험병태생리학적 논거 외에도, 특정 사례의 다른 특징들이 실증적 근거만을 따랐다면 내려졌을 결정과 다른 결정을 지지하도록 작용할 수 있다.

 

  • 가장 명백한 예는 의학적으로 적응증이 있고 우수한 임상근거에 의해 지지되는 중재를 환자가 거부하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심근경색 후의 한 남성이 베타차단제(beta-blocker) 치료가 통계적으로 생존기간을 연장할 가능성이 있음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발기부전(impotence)이라는 부작용 때문에 그 치료를 거부할 수 있다. 최근 EBM은 개별 환자의 목표와 가치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지만, 그것들을 알고리즘과 의사결정분석(decision analysis)에 더 잘 맞는 “환자 효용(patient utilities)”의 형태로 계량화하고 처리하려고 해 왔다(Naglie et al. 1997; Man-Son-Hing et al. 2000).
  • 질 높은 근거가 진료를 결정할 수 없는 또 다른 단순한 예들은 실증적 근거가 지지하는 진료를 제공하기 위한 자원의 가용성(availability of resources)을 중심으로 한다. 예를 들어, 심근경색에서 응급 혈관성형술(emergent angioplasty)의 이점은 첨단 시술실(advanced procedure lab)과 중재심장전문의(interventional cardiologist)에 접근할 수 없는 기관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다.

 

따라서 임상의는 실증적 근거뿐 아니라 자신의 임상경험 지식(experiential knowledge), 병태생리에 대한 이해, 환자의 목표와 가치, 그리고 자신이 일하는 의료시스템 내에서 진료의 장애요인과 촉진요인을 모두 다루어야 한다. 이러한 잠재적 행위 정당화 근거 각각에 부여되는 상대적 무게는 당면한 사례의 구체적 특징에 달려 있다. 이러한 개별 사례 의존성(case-dependence)을 인정하면, 임상적 의사결정에 대한 사례주의적 이해(casuistic understanding of clinical decision making)가 지금까지 EBM이 제공한 설명보다 최적의 의학 실천(optimal medical practice)에 대해 더 만족스러운 설명을 제공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근거의 통합: 사례주의적 접근 Integrating the evidence: a casuistic approach 

Jonsen과 Toulmin이 실천적 도덕추론(practical moral reasoning)의 역사를 검토한 『The Abuse of Casuistry』에서, 저자들은 임상의학을 “실천적(practical)” 활동의 주된 예로 사용한다(Jonsen & Toulmin 1988). 그들은 임상적 의사결정이 개별 질병의 특수성(particularities of individual illness)을 다루기 위해 의학에 대한 이론적 이해와 특정 기술적 능력뿐 아니라 신중함(prudence) 또는 프로네시스(phronesis)를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저자들은 임상의학이 사례주의적 활동(casuistic undertaking)이라고 주장한다. Hunter도 “근거중심의학”이라는 용어가 의학문헌에 처음 등장하기 3년 전에, 임상의학을 사례주의(casuistry)로 이해해야 한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제시했다(Hunter 1989). 이후 Jonsen과 동료들은 임상 상황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들과 각각을 고려하는 방법을 구체화함으로써 의학윤리에 대한 사례주의적 접근을 주장하고 체계화했다(Jonsen et al. 1992). 그러나 임상적 의사결정 자체에 관련된 주제를 구체화하는 데에는 훨씬 적은 관심이 기울여졌다. 임상의학에 대한 사례주의적 이해에 필요한 주제들은 특정 임상적 결정에 관련된 윤리적 쟁점을 평가하는 데 핵심적인 주제들과 분명히 겹칠 것이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의학적 의사결정의 여러 잠재적 정당화 근거를 “근거”라는 우산 아래에 두려는 현재의 EBM 시도는 주로 실증적 근거(empirical evidence), 임상경험 근거(experiential evidence), 병태생리학적 이해(pathophysiologic understanding)가 정도에서가 아니라 종류에서 서로 다르다(differ in kind, not in degree)는 사실 때문에 실패한다. 따라서 이 세 종류의 의학지식은 임상적 의사결정에 대한 사례주의 모델의 첫 세 주제가 된다. 각 주제 안에서는 가치의 위계(hierarchy of value)가 발전될 수 있지만, 한 주제가 다른 주제에 비해 갖는 중요성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임상경험이 실증적 근거보다 반드시 덜 중요하거나, 병태생리학적 이해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각 주제에 부여되는 상대적 무게는 당면한 사례에 따라 달라진다. 다음은 이 초기 세 주제 각각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다.

 

  • 실증적 근거(empirical evidence)는 임상연구에서 비롯되며, 실제 진료를 하는 의사에게는 출판된 보고서(published reports)를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 연구설계(study design)와 통계적 견고성(statistical robustness)에 따라 그러한 근거의 사례들을 순위화하는 실증적 근거의 위계는 대체로 합의되어 있다. 다만 특정 연구설계의 상대적 강점에 대해서는 아직 논쟁이 있다(Concato et al. 2000). 실증적 근거에 관한 출판 보고서에 접근하고, 해석하고,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은 서구 의학교육(Western medical education)의 주요 초점이 되었다(Green 2000). 이러한 종류의 의학지식에 의존하는 것의 가치는 EBM 지지자들에 의해 잘 목록화되어 있다. 실증적 근거의 주요 한계는 그것이 어떤 특정 환자에게도 직접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과 관련된다(Feinstein & Horwitz 1997; Tonelli 1998).
  • 임상경험 근거(experiential evidence)는 환자를 직접 진료하면서 얻은 지식을 포괄한다. 실제 진료를 하는 의사는 개인적 경험에 의존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배우려 할 수도 있다. 임상경험 지식에서는 일반적으로 더 많은 경험이 더 적은 경험보다 낫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특정 질병을 가진 많은 수의 환자에 대한 광범위한 경험에 기반한 전문가 의견(expert opinion)은 임상경험 근거의 가장 높은 형태로 볼 수 있다(Tonelli 1999). 임상경험 지식의 주요 문제는 그것이 여러 종류의 인지편향(cognitive bias)에 취약하다는 점이며(Elstein & Schwarz 2002), 그 결과 인과성(causality)이나 치료효과(treatment effect)에 대해 잘못된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
  • 병태생리학적 이해(pathophysiologic understanding)는 질병을 신체적 자기(physical self)의 교란(perturbation)으로 이해하는 일반적인 서구적 질병관에서 나온다. 기본적인 생물학적·생리학적 원리를 이해하면 의사들은 제시되는 특징(presenting features)을 진단과 연결할 수 있고, 치료 반응을 예측하고 측정할 수 있다. 병태생리학적 추론의 강점은 주로 그 바탕이 되는 생물학적 또는 생리학적 이론의 강도에 달려 있다. 과학적 원리로부터 추론하는 것의 주요 한계는 생리학적 지표(physiologic measures)와 사망률(mortality), 삶의 질(quality of life) 같은 의미 있는 결과(meaningful outcomes) 사이의 관계가 불확실하다는 데 있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인식론적 주제(epistemic topics)에 더해, 어떤 의학적 결정에도 관련되는 두 가지 다른 주제가 있다.

 

  • 아마도 가장 명백한 것은 개별 환자의 목표, 가치, 선호(goals, values and preferences)를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의학지식만으로는 “A의 가능성을 최대화하고 싶다면 B를 하라”는 형식의 가언명령(hypothetical imperatives)만을 만들어낼 수 있다. “A의 가능성을 최대화하는 것”이 적절하고 의미 있는 목표인지를 결정하려면 환자의 가치(patient values)를 통합해야 한다(Tonelli 1998).
  • 어떤 임상적 결정에도 관련되는 마지막 주제는 “시스템 특성(System Features)”이라는 넓은 범주에 속한다. 여기에는 진료의 경제적, 물류적, 법적, 문화적 장애요인 또는 촉진요인이 포함된다. 특정 중재의 비용, 가용성 또는 합법성은, 그 중재를 지지하는 강한 실증적·임상경험 근거가 있는 상황에서도 그 사용을 배제할 수 있다. 더 미묘하게는, 의료전달체계(health care delivery system) 자체뿐 아니라 전문직적·사회적 가치(professional and societal values)도 개인의 진료와 관련된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러한 고려가 항상 명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인식조차 되지 않는다.

 

어떤 의학적 결정에도 관련되는 다섯 가지 주제는 Table 2에 제시되어 있다. 다시 강조해야 할 중요한 점은 어떤 주제도 다른 주제보다 일반적 우선권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주제든 특정 임상적 결정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가 될 수 있다. 이 사례주의적 임상의학 모델에서 임상판단(clinical judgment)은 각 주제 영역에서 나오는 특정한 행위 정당화 근거들을 처리하고 저울질하여 최선의 행동방침(best course of action)에 관한 잠정적 결론(presumptive conclusion)에 도달하는 능력으로 볼 수 있다. 많은 경우 임상적 결정은 비교적 명확하다. 예컨대 실증적 근거, 임상경험 근거, 병태생리학적 이해가 모두 특정 치료계획을 시사하고, 그 치료가 이용 가능하며, 환자도 그것을 원할 때가 그렇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는 실증적 근거와 임상경험 근거 또는 병태생리학적 이해가 서로 다른 접근을 시사할 수 있다. EBM 접근법은 그러한 상황에서 실증적 근거에 일반적 우선권을 부여해 왔다. 그러나 그러한 접근은 철학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실증적 근거를 “양심적이고 신중하게(conscientious and judicious)” 사용한다는 것은 개별 상황이 요구하는 것처럼 보일 때 임상의가 그 근거를 제쳐둘 필요가 있음을 의미할 수 있다.


Table 2. 임상적 의사결정의 다섯 가지 주제 
The five topics of clinical decision making 

주제 설명
실증적 근거(Empirical evidence) 임상연구(clinical research)에서 도출된다.
임상경험 근거(Experiential evidence) 개인적 임상경험 또는 다른 사람의 임상경험, 즉 전문가 의견(expert opinion)에서 도출된다.
병태생리학적 논거(Pathophysiologic rationale) 생리학, 질병, 치유에 관한 기저 이론(underlying theories of physiology, disease and healing)에 기반한다.
환자의 가치와 선호(Patient values and preferences) 개별 환자와의 개인적 상호작용(personal interaction)에서 도출된다.
시스템 특성(System features) 자원 가용성(resource availability), 사회적·전문직적 가치(societal and professional values), 법적·문화적 관심사(legal and cultural concerns)를 포함한다.

고립된 실증적 근거 Empirical evidence in isolation 

지금까지 나는 실증적 근거가 다른 종류의 의학지식보다 일반적 우선권을 갖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 외에는, 실증적 근거가 임상적 의사결정에 어떻게 통합되는지를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EBM에서 중요하지만 대체로 간과되어 온 또 다른 측면은, 의학지식의 이 종류가 다른 잠재적 의학적 의사결정 정당화 근거와 어떻게 관련되는가가 아니라, 의사들이 실증적 근거 그 자체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와 관련된다. 나는 실증적 근거로부터 추론하는 것(reasoning from empirical evidence) 역시 구체적으로는 실천적 또는 사례주의적 추론(practical or casuistic reasoning)의 한 형태라고 주장한다.

 

임상연구, 특히 무작위대조시험(randomized controlled trial)은 보편적이고 일반화 가능한 지식(universal and generalizable knowledge)을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 아래에서 어떤 특성은 공유하지만 다른 특성은 공유하지 않는 개인들의 집단(populations of individuals)에서 관찰된 치료효과(treatment effects)를 보고한다. 따라서 임상연구에서 도출된 실증적 근거는 현재 눈앞의 환자(patient-at-hand)에 대해 연역적 결론(deductive conclusions)을 끌어낼 수 있는 보편적 진리(universal truths)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환자와 비교할 수 있는 하나의 합성된 “평균 환자(average patient)”의 사례를 제공한다(Feinstein & Horwitz 1997).

 

Jonsen과 Toulmin의 사례주의 설명을 사용하면, 잘 수행된 임상연구는 임상의에게 “전형적(paradigmatic)” 사례를 제공한다. 임상의는 현재 환자가 임상연구에서 제공된 “평균” 환자충분히 유사하여 그 연구의 결론을 해당 환자의 진료에 통합할 만한지를 결정해야 한다. 만약 현재 환자가 “평균” 연구대상자와 다르다면, 임상의는 그 차이가 연구에서 도출된 결론이 현재 결정에 관련되지 않는다고 볼 만큼 중요한지를 결정해야 한다. 현재 환자가 연구 속 “평균” 환자와 얼마나 유사한지는 연구 결과에 얼마나 많은 무게를 둘지를 결정한다. 때때로 임상의는 현재 환자가 한 연구에 등록된 환자들과 더 유사한지, 아니면 다른 결과를 산출한 또 다른 연구에 등록된 환자들과 더 유사한지를 물어야 한다. EBM 지지자들도 필수적이라고 인정하는 이 과제는 본질적으로 사례주의적이다. 이 과정이 올바르게 수행된다면,

 

  • 그것은 의학문헌 속 다른 잠재적 “전형적” 사례들과의 비교뿐 아니라,
  • 임상의의 개인적 경험에서 나온 실제 사례(real cases),
  • 그리고 아마도 전문가 동료들의 경험에서 나온 개별 또는 집합적 환자들과의 비교도 포함한다.

 

추론은 유비(analogy)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며, 실제 사례이든 “평균” 사례이든 현재 사례와 가장 유사한 사례를 찾는 과정이 된다. 차이점들은 현재 사례에 대한 잠정적 결론을 거부할 만큼 중요한 구분을 나타내는지 보기 위해 고려되어야 한다. 결국 최선의 행동방침에 관한 잠정적 결론에 도달하려면, 생리학적 고려와 시스템 관련 고려, 그리고 환자의 목표와 가치도 고려되어야 한다.


 

사례주의적 접근이 EBM에 갖는 함의
Implications of the casuistic approach for EBM 

임상의학에 대한 사례주의적 이해는 현재의 EBM 이해에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 첫째, EBM이 학생과 의사에게 임상연구를 개발하고, 획득하고,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 현재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은 최적의 의료(optimal medical care) 제공을 장려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근거적 정당화 요소와 비근거적 정당화 요소 사이의 협상에서 발생하는 어려움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EBM은 연구 해석(study interpretation)과 통계적 방법(statistical methods)에는 능숙하지만, 탄탄한 임상판단(sound clinical judgment)에 필요한 복잡한 추론 능력을 인식하고 발전시키는 데 실패하는 한 세대의 의사를 양성할 위험이 있다. 임상연구 보고서를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기술은 의사교육에서 계속 필수적이겠지만, 의학교육은 임상적 의사결정에서 주로 실증적 근거에 의존하는 것의 한계를 직접 다루어야 한다.
  • 둘째, 임상의학에 대한 사례주의적 이해는 임상적 의사결정이 개인적이고 신중함을 요구하는 활동(personal and prudential undertaking)임을 인정한다. 따라서 임상의들은 유사한 사례에서도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러한 변이(variability)의 수용은 EBM이 명시한 이점 중 하나, 즉 진료 변이(practice variability)를 제한한다는 주장과 상충한다. 실증적 연구가 처방적(prescriptive)이지 않으며, 실증적 근거로부터의 추론이 연역적(deductive)이지 않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EBM은 특정 사례에 올바른 행동방침이 있다고 가정한다. 그것은 “근거에 의해 지지되는(supported by the evidence)” 행동방침이다. 실증적 근거의 축적이 불충분하다고 보일 때에만, EBM은 다른 종류의 의학지식이 신뢰할 수 없다고 간주된다는 이유로 진료에서 상당한 변이를 허용한다.
  • 그러나 임상적 결정은 임상연구가 부족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러한 연구에서 도출된 어떤 규칙에도 예외가 항상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잠정적(presumptive)인 상태로 남는다. 훌륭하고 풍부한 임상연구는 많은 수의 단순한 사례에서 진료를 안내할 만큼 설득력 있을 수 있지만, 의사는 현재 환자가 예외일 가능성에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그리고 EBM은 각 사례에서 잠재적으로 관련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의학지식을 의사들이 고려하도록 허용할 뿐 아니라 장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근거(the evidence)”에 기반한 새로운 독단적 의학 권위(dogmatic kind of medical authority)를 만들어낼 위험이 있다(Feinstein & Horwitz 1997).

그러나 사례주의적 접근은 EBM의 핵심 가치 중 일부를 받아들인다. 특히 이 접근은 의학적 추론(medical reasoning)이 엄밀하고 명시적이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의사들은 서로 다른 잠재적 정당화 근거에 부여하는 무게에 따라 최종 평가가 달라질 수 있지만, 결론에 도달할 때 이용 가능한 실증적 근거를 인식하고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위에서 개괄한 사례주의적 방법은 임상적 의사결정에 대한 쉽게 가르칠 수 있고 형식화된 접근을 제공하며, 이는 수련 중인 의사들의 교육을 촉진할 가능성이 높다. 임상의들 사이의 단순한 스타일이나 의견 차이로 보일 수 있는 것들도, 명시화되어 서로 충돌하는 정당화 근거들에 부여된 무게의 차이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 결과 진료 변이의 근본 원인(root causes of practice variability)이 명확해지고 공개적으로 논의될 수 있으며, 교육과정이 개선될 수 있다.


결론(Conclusion)

EBM의 철학적 토대(philosophical underpinnings)는 결코 잘 설명된 적이 없으며, 지난 10년 동안 상당히 변화해 왔다. 임상연구가 생성하는 지식의 종류를 주의 깊게 분석해 보면, 그러한 지식을 개별 임상적 의사결정에서 처방적인 것으로 보려는 시도는 오류임이 드러난다. 오히려 임상의는 실증적 연구를 사례주의적 방식(casuistic fashion)으로 사용하며, 현재 환자(patient-at-hand)를 의학문헌에서 제공되는 전형적 사례(paradigmatic cases)와 비교한다. 그 다음 임상의는 해당 사례에 대한 잠정적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다른 잠재적 행위 정당화 근거들을 고려해야 한다. 어떤 특정 임상적 결정에도 관련되는 다섯 가지 주제는 1) 실증적 근거(empirical evidence), 2) 임상경험 근거(experiential evidence), 3) 병태생리학적 이해(pathophysiologic understanding), 4) 환자의 목표와 가치(patient goals and values), 5) 시스템 특성(system features)이다. 따라서 숙련된 임상의는 현재 환자를 다룰 때, 문헌과 경험 모두에서 나온 전형적 사례들과 환자를 비교하면서, 실천적 추론과 이론적 추론을 모두 사용하여, 서로 충돌할 수 있는 이러한 행위 정당화 근거들을 저울질한 뒤 적절한 행동방침에 관한 잠정적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임상의학에 대한 이러한 사례주의적 이해는 의학교육뿐 아니라 의료 제공에도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임상적 의사결정의 개인적이고 신중한 성격은, 임상의들이 개별 환자 진료에 관한 평가, 결론, 권고에서 합리적으로 차이를 보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최적의 임상의학 실천(optimal practice of clinical medicine)은 임상연구 결과에 대한 지식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특정 개인에게 최선의 진료를 제공하려는 각각의 시도에서 의사들이 근거적 행위 정당화 요소(evidentiary warrants for action)와 비근거적 행위 정당화 요소(non-evidentiary warrants for action)를 모두 사려 깊게 고려할 것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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