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한 대학에서의 세미나 발표 후 이어진 Q&A 기록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얻어 작성되었습니다.

 

며칠 전 한 의과대학에서 "의과대학생 이해하기"라는 제목으로 세미나를 진행했다. 이른바 'Z세대' 학생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강의 자체보다 끝나고 이어진 질의응답이 더 오래 머릿속에 남았다. 좋은 질문은 강연자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지점을 드러내주는 법이다. 그날 받은 세 개의 질문이 꼭 그랬다.

 

세미나의 핵심 메시지는 단순했다. "요즘 학생들은 왜 저럴까"라는 물음을 학생 쪽에서만 던질 게 아니라,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온 가정을 한 번쯤 의심해보자는 것. 그리고 학생을 'Z세대'라는 하나의 납작한 라벨로 묶어 똑같이 보기보다, 그 안의 다양성을 보자는 것이었다. 질의응답은 바로 그 메시지가 현장에서 어떻게 부딪히는지를 보여주었다.

첫 번째 질문 — "최소한의 존중은 어떻게 얻나요"

기초의학을 가르치시는 한 교수님이 의예과 1학년 수업을 맡고 계신다며 물으셨다. 학생들의 특성을 이해하려 애쓰고, 많이 믿어주고 품어주라는 이야기에도 공감하지만, 그래도 강의하는 교수로서 받고 싶은 '최소한의 존중'은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렸다. 의예과라는 제도가 존재하는 한, 이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기 어렵다고. 의예과 2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암묵적 메시지를 보낸다. "이 시기의 학업 성취에 대해 우리는 나중에 크게 신경 쓰지 않겠다"는 메시지다. 그 안에서 학생들이 보이는 태도를 개인의 인성 문제로만 환원하기는 어렵다.

 

다만 진짜 '문제 행동'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것은 개별 교수가 감내할 일이 아니라 학교 차원에서 어떤 형태로든 액션이 필요한 일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학생들은 또 하나의 메시지를 받는다. "이 학교는 문제 행동을 해도 문제 삼지 않는구나."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전제가 하나 있다. '무례함'이 개별 교수의 취향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겐 모자가, 누군가에겐 슬리퍼가, 누군가에겐 말투가 무례로 읽힌다. 이 기준을 문서화하고 명확히 천명해야 비로소 학교가 제재할 규정적 근거가 생기고, 학생도 "이런 행동은 문제가 되는구나"를 분명히 인지하게 된다.

 

결국 의예과 문제는 수십 년간 어느 대학도 풀지 못한 난제다. 의예과를 유지하며 그 부작용을 감내하거나, 폐지하고 본과 6년 같은 또 다른 부담(이번엔 학생의 스트레스)을 떠안거나의 선택일 뿐, 완벽한 제도는 없다.

두 번째 질문 — "인사를 안 하는 학생, 어떻게 하죠"

조금 더 사적인 질문이 이어졌다. 서로 아는 사이인데도 복도에서 학생이 인사를 하지 않는다, 교수가 먼저 인사해야 하느냐, 어떻게 하면 인사를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강의에서 소개한 프레임워크를 다시 꺼냈다. 핵심은 두 가지를 구분하는 일이다. 학생이 (1) 교수를 존중하지 않아서 인사를 안 하는 것인지, 아니면 (2) 존중하는 마음은 있는데 그것이 '인사'라는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는 것인지. 둘은 전혀 다른 문제이고, 접근법도 달라진다.

 

여기에 또 하나의 축이 더해진다. 개인의 문제냐, 문화의 문제냐. 50명 중 한 명만 인사를 안 한다면 그 학생의 문제지만, 50명이 다 안 한다면 그것은 이미 학생들 사이의 컨센서스, 즉 문화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교수끼리 모여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학생들과 직접 대화해야 한다. 그리고 학생은 인사 대신 정중한 이메일, 한 번 더 던지는 질문, 성실한 공부처럼 다른 방식으로 존중을 표현하고 있을 수도 있다. (여담이지만, 한 교수님께서는 병원 맥락에서는 오히려 인사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임상 교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한 교수님은 학생이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 같은 교수님께 굳이 인사를 해야 하느냐'고 물은 질문에 어떻게 답하셨는지를 공유해주셨다. 이 교수님께서는 "인사를 안 해서 네가 얻는 이득이 뭐니?"라고 돌려 물으시고는, 인사의 장점을 설명해줬다고 하셨다. 교수가 너를 더 기억하고, 더 좋은 인상을 갖고, 나중에 만났을 때 훨씬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돈 한 푼 들지 않는 인사를 왜 굳이 안 하려 하느냐고. 그 뒤로 그 학생은 누구보다 열심히 인사를 했다고 한다. 

 

여기서 얻은 통찰이 있다. 요즘 학생들은 이득과 손해에 매우 민감하다. '존중'이나 '가치'의 언어로 설득하면 잘 먹히지 않고 오히려 치사하게 느껴지지만, 손익의 프레임으로 다가가면 일단 행동이 바뀐다. 이메일 교육에서도 똑같이 말한다. "무례한 이메일은 결국 네 손해다." 무례한 이메일은 받는 사람이 보내는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는 방식, 함께 일하고 싶은 마음, 회신 여부와 속도에까지 영향을 준다는 근거도 이미 충분하다. 이메일을 잘 쓰는 건 교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 자신을 위해서다.

세 번째 질문 — "그럼 교수의 답답함은 누가 풀어주나요"

가장 아팠던 질문은 마지막이었다. 한 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강의 제목은 '의과대학생 이해하기'인데, 정작 앉아서 듣는 사람은 교수다. 임상에서도 늘 "학생들이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기만 한다. 학생에게 '너에게 이익이 되니 이렇게 하라'고 설득하는 방법 말고, 교수 입장에서 이 답답함을 어떻게 풀어야 관계가 나아지겠느냐고.

 

깊이 공감했다. 사실 교수 개발 강의를 할 때마다 느끼는 일종의 죄책감이 있다. 결론이 늘 "교수가 더 해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이미 임상과 병원의 과중한 업무 속에서, 시간이든 감정이든 노력이든 무언가를 더 요구하는 이야기라는 걸 나도 안다. 그래서 해야 할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도, 오히려 더 큰 부담만 지워드리는 건 아닌가 늘 조심스럽다.

 

다만 분명한 것이 있다. 학생에게 교수의 마음을 이해해달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다. 내가 내 자식에게 부모 된 마음을 이해하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나 역시 부모가 되기 전에는 그 마음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 교수의 답답함은, 같은 답답함을 가진 동료들끼리 모여 터놓고 이야기하며 푸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임상이든 연구든 교육이든, 같은 스트레스를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늘 강의를 한 줄로 줄이면 이렇다. 학생을 'Z세대'라는 라벨 하나로 납작하게 묶어 똑같이 보지 말고, 그 안의 다양성을 보자. 학생을 다 이해하고 다 품어주는 천사가 되자는 게 아니다. 동료끼리 답답함을 나누되, 그 방향이 학생을 악마화하거나 단세포적 존재로 깎아내리는 쪽이 아니라, '가능성 있는 존재'로 바라보는 쪽이기를 바랄 뿐이다.

 

나도 내 아이에 대한 고민을 나누곤 하지만 결국 도달하는 지점은 비슷하다. "그래도 믿어줘야지, 우리 아이인데." 교수와 학생의 관계가 부모와 자녀의 관계와 똑같을 수는 없겠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그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어쩌면 또 하나의 짐을 지워드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점이 못내 죄송하다. 그러나 좋은 질문을 던져주신 덕분에, 나는 강의에서 다 하지 못한 말을 비로소 정리할 수 있었다. 강의보다 길게 남은 것은 결국 그 질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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