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 way of seeing is a way of not seeing."이라고 한다. 비단 seeing 뿐이겠는가. listening, feeling, tasting, 나아가 doing도 마찬가지다.
즉, every way of doing is a way of not doing이다. 어떤 학습법을 쓴다는 이야기는 그 대신 쓰지않게(또는 못하게) 된 다른 학습법이 있다는 이야기이고, 어떤 교수법을 쓴다는 이야기는 그 대신 쓰지않게(또는 못하게) 된 다른 교수법이 있다는 이야기이며, 어떤 평가법을 쓴다는 이야기는 그 대신 쓰지않게(또는 못하게) 된 다른 평가법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교육에 관한 결정사항을 내려야 할 때 늘 따라오는 질문은 "그래서 다른 곳(의대)은 어떻게 한데요?"이다. 물론 최선의 대안을 찾기 위해서는 다양한 대안을 알아야 할테지만, 무언가를 한다는 이야기는 동시에 무언가를 안(못) 한다는 의미일 수 있다. 따라서 이미 가능한 대안적 옵션이 열거된 상태에서 알아야 할 것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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