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 그 후>
의협과 정부, 여당은 타협을 했지만, 대전협(대한전공의협의회) 파업과 의대협(대한 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학생협회) 동맹휴학과 국시거부(국시 실기시험 응시 거부)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다. 대전협은 내가 뭐라 말을 보테기에는 정보와 경험도 부족하고, 그럴 입장도 아니다. 다만 동맹휴학에 대해서는 그나마 의과대학에서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보니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어 조금 적어본다. (국시거부와 동맹휴학을 반대하려는 것도, 그러지 말라고 설득하려는 것도 아니다. 뭐 나 따위가 그럴 영향력도 인지도도 없고.)
1. Background: 타이밍
가장 걱정되는 것은 이 고약한 ‘타이밍’ 때문이다.
동맹휴학과 국시거부를 엄밀히 구분하면 동맹휴학은 개별 의과대학과 관련된 문제이고, 국시거부는 국시원과 관련된 문제이다. 하지만, 사실상 ‘의과대학생’의 단체행동이라는 점에서 두 가지가 개별적으로 움직일 것으로 기대하긴 어렵다. 더 정확히는 국시 실기시험 거부가 지속되는 한, 동맹휴학이 별도로 중단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따라서 ‘타이밍’은 지금 동맹휴학과 국시 실기시험 거부에 있어서 가장 고약한 지점이다. 우선 국시원은 “응시취소 및 환불신청서 기 제출자 응시원서 재접수 신청 관련 안내”에 대해 “응시를 희망할 경우, 2020. 9. 6.(일) 24:00까지 다음의 사항을 국시원으로 회신”이라고 되어있다. 헌데 대전협은 9월 7일 오후 1시에 다음 행동을 결정할 투표를 한다고 알고 있다. 문제는 동맹휴학(예1~본3)가 국시거부(본4)와 완전히 독립적이지 않은 것처럼, 국시거부가 어느 정도 전공의 파업과 독립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요컨대, ‘전공의 파업’, ‘국시거부’, ‘동맹휴학’은 세 가지가 어느 정도 서로 연결되어 있는 양상으로 보인다. 다르게 말하면, ‘전공의 파업 지속여부’에 따라서 ‘국시거부 여부’를 달리할 본4 학생이 적지 않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전공의 파업’ 지속여부가 7일에 결정되는 상황에서, ‘국시 재접수’가 6일까지 결정되어야 하는 이 타이밍은, 너무도 고약하다. 물론 의대협도, 대전협도, 그리고 국시원도 이 상황을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2. 군비경쟁
우리나라 대입은 일종의 군비경쟁 양상을 띤다. 어떤 대학, 어떤 과를 갈지 ‘모르기’ 때문에 우선 모든 영역에서 최대한 높은 점수를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 된다. 개인 수준에서 이러한 행동은 매우 합리적이고 합당한 선택이다. 문제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행동할 때,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이다.
의과대학에서 안타까운 것은 (나 자신도 그러했지만) 이러한 양상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어떤 과를 갈지 ‘모르기’ 때문에, 우선 최대한 높은 학점을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 된다. 대입에서의 행동양상에 대해 개개인을 탓할 수 없듯, 여기서도 개별 학생을 탓할 수는 없다. 특히나 나처럼 의과대학 교육에 지속적으로 관여하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내가 어떤 과에 맞는지 판단하려면 충분한 정보과 경험이 제공되어야 하는데, 그런 교육 프로그램을 제대로 제공하지 못하는 점에서 나조차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어쨌거나 현실은 의과대학에 와서도 고등학교때부터 이어져온, ‘단순히 상대보다 우위에 서기 위한 군비경쟁’이 그대로 재현된다는 점이다.
개개인 수준에서 군비경쟁을 선택하게끔 유도하는 시스템 수준의 기전은 “한타(打)싸움”이다. 대입이든, 레지던트 선발이든 한 번의 경쟁에 모든 것이 걸린, 엄청난 고부담 평가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한 방 싸움이라는 성격의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당연히 내가 모을 수 있는 가장 큰 “원기옥”을 모아야 한다.
그런데, 이런 결정적인 몇 가지 순간을 빼고 나면, 개개인의 삶에서 많은 것들은, 그리고 집단 간에 발생하는 사회적 갈등은, “한 방 싸움”이 아니다.
3. 목표
뜬금없이 교육과정개발(curriculum development) 이야기를 하자면, 그 첫 단계는 ‘요구사정(needs assessment)이다. 또 뜬금없이 자기주도학습(self-directed learning) 이야기를 하자면, 그 첫 단계 역시 ‘학습 요구의 진단(diagnosing learning needs)’이다. 그리고 ‘요구’란 현재 상태(current state)와 이상적 상태(ideal state)의 차이(gap)이다. 이 차이가 파악되면, 목적과 목표, 전략이 그 뒤에 따라온다.
동맹휴학과 국시거부라는 단체행동의 목표를 알기 위해 의대협 페이스북 페이지를 찾아봤다. 8월 24일 게시된 바에 따르면(물론 그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지만), “우리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현 당정이 독단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악성 의료정책의 전면 철회, 그리고 의료계와 함께하는 전면 재논의가 그것입니다.”가 목표이다. 어제의 타협이 이 목표에 부합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개개인마다 판단이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의대생들이 동맹휴학과 국시거부를 이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그에 따라 나에게 발생하는 모든 영향(예를 들어, 내년부터 적어도 2020+2021 학번에 대해서는 두 배의 학생을 교육해야 하는 상황으로 인한 것들)을 기꺼이 감내할 것이다.
다만, 이 상황의 여파를 기꺼이 감내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부디 이 단체행동의 요구(needs)-목적(goals)-목표(objectives)-전략(strategies) 사이의 연결이 견고하고, 타당하기를 바란다. 위에서 말했듯, 당면한 문제는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을 걸어서 일거에 해결해야 하는 “한 방 싸움”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떻게 결정하든, 학생들이 진정한 ‘용기’를 낼 수 있기를 바란다. 학생들이 비록 두려움과 불안함을 굳건한 연대를 통해서 극복해내고 있지만, ‘용기’란 그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그 두려움보다 더 중요한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판단’이기 때문이다 (“Courage is not the absence of fear, but rather the judgment that something else is more important than f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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