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마음과 한국의 의사상: 현재의 교착상태를 해석하는 렌즈>
1.
나의 사고틀에 큰 영향을 준 책 중에 하나는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마음”이란 책이다. 제목만 보아서는 그 의미가 잘 와닿지 않는데, 차라리 “The righteous mind”라는 영문 제목을 보면 조금 더 느낌이 오고, 이 책의 부제인 ‘나의 옳음과 그들의 옳음은 왜 다른가’에서 이르면 제법 명확해진다. 저자는 어떤 행동이나 사안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의 원칙으로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한다.
▷제1원칙: 직관이 먼저이고, 전략적 추론은 그 다음이다
▷제2원칙: 도덕성은 단순히 피해와 공평성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제3원칙: 도덕은 사람들을 뭉치게도 하고 눈멀게도 한다.
2.
이 세 가지 원칙 중, 저자는 제2 원칙을 ‘미각’에 비유한다. ‘바른 마음’, 즉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수용체'는 마치 혀에 있는 미각 수용체와 같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어떤 음식의 맛은 여러 가지 맛의 조합인 것처럼, 사안의 옳고 그름(=맛)을 판단하는 기준(=미각 수용체)도 단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덕 “수용체”를 다섯 가지 – 배려, 공평성, 충성심, 권위, 고귀함 – 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여러 정치적(진보-보수) 갈등의 원인은 정치 성향에 따라 서로 다른 수용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진보적 성향(liberal)일수록 배려와 공평성이 도덕적 판단의 핵심 근간을 이루고(상대적으로 충성심, 권위, 고귀함은 덜 중요하고), 보수적 성향(conservative)은 그 반대이다(그림 1).
3.
마음의 작동 원리가 이렇기에, 서로 다른 정치적 성향의 사람이 어떤 사안을 놓고 논쟁을 벌일 때, 쉽사리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서로 다른 도덕적 판단 기준(=수용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음식을 두고, 한 쪽에서는 짠 맛에 민감한 사람이 너무 짜서 맛없다고 하는데, 다른 쪽에서는 단 맛에 민감한 사람이 너무 달아서 맛 없다고 하는 상황이다. 결국 단짠단짠이 제일 맛있는데.
의예과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이 책을 가르칠 때에는 2018년 평창올림픽에서의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논란’을 예시로 들었다. 아주 엄밀하지는 않지만, 찬성 입장과 반대 입장은 같은 도덕성 기반에서(즉 같은 종목의 경기를)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경기장에서 서로 다른 종목을 가지고 시합을 벌였다고 볼 수 있다(그림 2).
4.
많이 돌아왔는데, 그래서 현재 정부와 의료계의 사이의 충돌도 다른 많은 정치적, 정책적 이슈와 마찬가지로 ‘바른 마음’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 관점을 바꾸어보자면, 대한의사협회에서 2014년 발간한 “한국의 의사상”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문제를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다(그림 3).
마침 한국의 의사상도 다섯 가지 영역으로 되어 있다.
1. 환자 진료: 의사는 환자의 건강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한국의 의료체계와 상황 안에서환자와 사회의신뢰를 바탕으로 최선의 진료를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이를 유지·발전시킬수 있어야 한다.
2. 소통과 협력: 의사는 환자, 보호자, 의료진 그리고 사회와 상호소통하고 협력해야 한다.
3. 사회적 책무성: 의사는 환자의 건강과 사회의 안녕을 증진하기 위해 자신의 전문지식을 사용하고, 의료자원의 편성과 배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보건의료체계를 효과적으로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기여해야 한다. 또한 국내외 재난 구호에 참여하고 협력하며 미래 의료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4. 전문직업성: 의사는 인간의 건강과 생명을 위해 헌신하는 전문직업인으로서 전문적인 직무규범과 자율규제를 바탕으로 높은 수준의 직무윤리를 유지해야 한다.
5. 교육과 연구: 의사는 과학적 탐구정신을 갖고 평생 자기 주도적 학습을 하는 동시에, 교육자 및 연구자로서 최신 의학 지견을 개발, 습득, 보급하고 이를 업무에 적용해 그 결과를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5.
이렇게 다섯 가지를 놓고 보면, 의사 입장에서는 주로 1번과 2번에, 정부(또는 의사 파업을 비판하는 다수의 국민) 입장에서는 주로 3번과 4번에 기반을 둔 듯 보인다.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또 갈리는 지점이 있겠지만, 아주아주 대략적인 지형도를 그려보면 그렇다고 본다.)
예를 들어, 이번 사태에서, 여러 의사선생님들께서 ‘의사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순간적인 의학적 판단에 생사가 갈릴 환자 한 명 한 명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헌신과 고뇌와 희생의 시간을 보냈는지’를 절절히 와닿게 쓴 글을 종종 본다. 위의 다섯 가지에 대응시켜본다면, 이러한 글은 1과 2를 너무나도 훌륭하게 묘사한다. 다만, 3과 4의 증거가 되기에도 충분하다고 보기는 쉽지 않을 수 있다.
6.
나 자신이 의과대학만 졸업했고, 졸업 직후부터 기초의학(생화학-의학교육학) 진로로만 거쳐왔기에, 임상 경험이 전무하여 “(임상)의사”로서의 정체성은 희박하다. 정체성 뿐만 아니라, 경험과 실력은 부족 – 아니, 정확히 말하자 – 도 아니고, 그냥 ‘없다’. 실제로 비의료계 친구나 지인이 나보고 ‘너도 의사잖아’라고 하면, 나는 늘 당당히(?) “저는 의사면허소지자이지, 의사는 아니에요”라고 말한다. 그래서 여러모로 이 상황에 대해서 얼마 전에 올린 ‘외국’ 교과서의 한 구절처럼, 남의 입에서 빌려온 원론적인 이야기 말고는, 뭔가 한 마디라도 하는 것이 무척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한국의 의사상’을 들먹여가며 한 마디 보탠 것은,
첫째, 아무도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아서가 하나이고
(사족1. 당연히 어딘가 있지만 내가 못 봤을 것이다.)
(사족2. 그래도 이 문서가 '대한의사협회'가 공식적으로 발간한 '의사상'인데!)
둘째, 결국 어느 시점에든, 어떻게든 이 국면이 종결된다고 했을 때, 의학교육에 관여하는 사람으로서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기록해두기 위함이 다른 하나이다. 이미지(그림 3)에 있듯, 한국의 의사상의 서언에는 ‘이 문건이 대한민국 의사 양성을 위한 교육 과정과 의료를 수행하고 있는 의사의 전문성 유지와 개발에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라고 되어 있다.)
7.
다시 한국의 의사상으로 돌아가자. 의과대학에서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암묵적’으로, ‘잠재 교육과정’을 통해서 말고, ‘명시적’으로 ‘공식 교육과정’을 통해서 무엇을 가르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아마 우리나라 어느 의과대학을 보아도 1(환자 진료)과 2(소통과 협력)가 전체 교육시간의 9할은 차지할거다(적게 잡았다). 의사국가시험 필기시험에 ‘보건의약관계 법규’가 있다보니, 이 내용은 거의 모든 의과대학 교육과정에서 다루고 있을테고, 이건 3(사회적 책무성)과 4(전문직업성)의 일부에 해당한다. 요즘에는 연구역량이 강조되다보니 5(교육과 연구)도 다뤄지는데, 애석하게도 엄밀히 말하면 5에서 “연구”는 강조되지만 “교육”은…(후략) (내 전공이 의학교육학이라 굳이 따로 한번 언급한 것임(COI 있음)을 밝힌다.)
그리고 어떻게 결론이 나든, 이번 일은 medicine과 society의 “사회적 계약”을 바꿔놓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안 그럴 수도 있는데, 그러길 바란다는게 더 정확한 마음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사회적 계약”에는 의과대학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도 포함될 것이다. ‘대한의사협회’에서 발표한 ‘한국의 의사상’이 아무것도 아닌게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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