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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MLE의 탄생과 Application fever의 시작

Meded. 2022. 5. 31. 15:27

우리나라는 전공의 지원 시 ‘특정 병원, 특정 과’에만 지원한다 (일단 “어레인지”는 논외로 하자). 다시 말해, 딱 하나의 “전공의 수련 프로그램(Residency Program)”에만 지원한다. 일반인도 친숙한 대입을 예로 들자면, 학생들은 정시에서는 가, 나, 다군 세 개에 지원가능하고, 수시에서는 여섯 개 까지 지원가능하다.

 

그렇다면 미국의 의과대학 졸업생들은 몇 개의 전공의 수련과정에 지원할까? 놀라지 말자. 2019년을 기준으로, 평균적으로 미국 의과대학을 졸업한 학생은(US graduates) 65개에, 미국 바깥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학생(IMGs)은 137개 프로그램에 원서를 넣었다. 

 

‪J. Bryan Carmody는 이 현상을 “Application fever (과열된 경쟁적 전공의 지원)”이라고 명명한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럼 이렇게 되기까지 초기 과정은 어땠을까? J. Bryan Carmody 교수가 이 내용을 다룬 유튜브 영상이 있어 초반 1/3 정도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였다. 

 

https://youtu.be/Iy4NoT-yx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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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0년 초, USMLE Step 1이 Pass/Fail로 바뀐다는 발표가 이뤄졌다. 기초의학에 관한 객관식 문항으로 이뤄진 이 시험은 어떤 흐름 속에서 지금과 같은 역할을 맡게 되었을까?  

 

2. 이 문제는 NBME의 설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National Board of Medical Examiners(NBME)는 미국 의료에서 단순하지만 중요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 설립되었다. 그 문제는 바로 미국의 founding fathers가 의료행위에 대한 규제권한을 연방정부에 두지 않은 것이다. 

 

3. 이는 의료행위를 할 수 있는 사람과 할 수 없는 사람을 결정할 광범위한 권한이 주정부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889년의 판결에서도 법원은 누가 의사가 될 수 있고 될 수 없는지를 결정할 권한이 주정부에 있다고 판단했다. 

 

4. 한 주에서 면허를 받은 의사가 다른 주로 쉽게 움직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AMA의 회장 윌리엄 로드먼은 '하버드 의대를 졸업하고 매사추세츠 주에서 면허를 받고 보스턴에서 훌륭하게 수술을 하던 의사가 Mayo에서 진료를 하려면 다시 시험을 치러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이냐'며 문제를 제기했다. 

 

5. 이것이 바로 NBME를 설립하여 다루고자 바로 그 문제이다. 이들은 공통된 시험을 만들어서, 이 시험을 통과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미국 어떤 주에서든 추가 시험을 치를 필요 없이, 안심하고 면허를 받을 수 있는 매우 높은 퀄리티의 시험을 만들려고 했다.

 

6. 워싱턴DC에서 1916년 10월 16일부터 21일까지 행해진 첫번째 NBME 시험은 말 그대로 5일 짜리 시험이었다. 시험의 개요를 보면, 초기의 NMBE 시험은 완결적(comprehensive) 시험이었다. 미국 어느 주에서나 의사의 자질을 보증하겠다는 실용적 목적을 위해, 의사에게 필요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이 시험으로 확인하고자 했다. 

 

7. 시험의 형식에서 눈에 띄는 것은 객관식 문항(MCQ)이 없었다는 것이다. 시험은 구술시험, 논술, 실기시험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실기시험의 경우, 워싱턴 D.C.의 가필드 기념병원에서 수험생들은 실제 환자로부터 병력청취와 신체진찰을 하고, 그리고 나서 NBME 시험관들 중 한 명과 이를 바탕으로 한 구술시험을 보았다. 

 

8. NBME 시험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16년에는 소수의 주에서만 이 시험을 받아들였지만, 1927년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주가 이 시험을 인정했다.  

 

9. 다만 이 시험은 작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완결적 시험을 응시하는 것은 응시자 입장에서 매우 번거로운 일이었다. 비행기나 고속도로도 제대로 없던 시절에, 고작 50%가 합격하는 시험을 보기 위해서 특정한 도시로 가야 한다고 상상해보라. 절대로 괜찮은 사업 모델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10. 비록 1915년부터 1955년까지 시험 응시자는 꾸준히 증가했지만, 여전히 시험을 치르는 응시자의 수는 수천 명에 불과했다. 

 

11. 한편, NBME가 시험을 발표했을 무렵, 프레데릭 켈리라는 캔사스의 교육자가 객관식 문제MCQ라는 유형의 문제를 공개했다. 이 형식은 기존의 방식과 달리 채점에 대한 논쟁이 없었고, 무엇보다 IBM이 시험채점기계를 개발하며 매우 빠르게 채점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NBME의 기존 시험 형식이 무척 별로인 것처럼 보였다. 새로운 방식은 휴대성도 좋았고, 확장성도 좋았다. 결국 NBME는 시험 형식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시작했다. 객관식 필기시험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실기시험을 포함해야 하는가? 

 

12. 객관식 문항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도 있었다. 빠르고 정확하게 문제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고, 추론 능력보다 잔머리와 정보의 저장을 강조한다고 지적했다. 응시자는 객관식 시험이라는 형식에 맞춰 정보를 정리하고 훈련하기만 하면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의사가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정보의 조직화 방식이 아니고, 교육 성취도를 추정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서 완전히 불충분하며, 그렇게 사용된다면 해로운 영향을 미칠 것이라 우려했다. 

 

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을 객관식으로 전환할 때 예상되는 사업상의 이점은 너무 컸다. 실제로 시험이 객관식 형식으로 바뀐 후, 응시자는 엄청난 속도로 증가하였다. 흥미롭게도, 몇몇 주에서는 시험 변화 후에 NBME 인증서를 수용하길 거부했지만, 1990년 9월에 이르자 텍사스를 제외한 미국의 모든 주들은 NBME 시험을 받아들였다. NBME 시험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1960년대까지 모든 개별 주 시험은 사라졌다.  

 

14. 결국 미국에서 의사가 되는 경로는 두 가지로 정리되었다. 미국에서 의대를 졸업한 학생은 NBME part 1과 part 2와 part 3 시험을 치르고 면허를 취득할 수 있었다. NBME 시험을 받아들이지 않는 몇몇 주의 졸업생과 외국 의과대학 졸업생은 FLEX 시험을 치르고 면허를 취득했다. 그리고 이 시대에 미국에서 레지던트 교육과 의사가 될 기회를 노린 국외 의대 졸업생들의 수가 드라마틱하게 증가했다.  

 

15. 이 당시에도 오늘날처럼 이민에 관한 이슈는 까다롭고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1980년까지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의사 수가 과잉으로 향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미국에 들어오는 외국 의과대학의 졸업생들의 수가 제한되어야 한다는 권고가 있었다.  

 

16. 이러한 우려에서 좀 더 까다로운 FGEMS라는 시험이 만들어졌다. 이는 기초과학과 임상과학에 관하여, 이틀 동안 950개의 객관식 문제를 풀어야 하는 시험이었다. 이 중 기초과학은 약 20% 였다. 

 

17. 문제는 해외 의대 졸업생들이 (카리브해 또는 다른 곳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미국 시민'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이런 시스템은 불공평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은 NBME 시험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의 시행을 준비하려는 움직임으로까지 이어졌다. 결국 NBME와 FSMB는 1989년 의료면허에 관한 사실상 동등한 두 개의 경로 대신, 모든 사람이 치르는 하나의 시험을 만들기로 했다

 

18. 실제로 실행하는 데에는 몇 년이 더 걸렸지만, 1992년 USMLE Step 1의 첫 시행과 함께 마침내 NBME는 그들의 사명을 성취하였다. 미국 어디에서나 시험을 치르고 면허를 취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1992년은 USMLE의 탄생을 포함하여 의학교육과 레지던트 수련에 관한 세 개의 중요한 사건이 합류한 시기이기도 하다. 

 

19. 첫 번째는 이미 언급한 USMLE의 탄생이다. USMLE가 도입될 때 이뤄졌던 중요한 결정 중 하나는 시험 결과를 점수로 알려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새삼스러운 결정이 아니었고, 오히려 NBME의 오래된 전통이었다. 비록 면허를 발급하는 기관의 입장에서는 몇 점인지는 불필요하고, 합격 여부(면허 발급함 – 발급하지 않음)만으로 충분했지만, NBME는 수험생은 자신의 점수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0. 두 번째는 미국 의과대학 협회에서 Electronic Residency Application Service (ERAS)를 만들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전공의 지원은 컴퓨터로 이뤄지는 작업이 아니었다. 지원서, 추천서, 성적증명서 등 무수한 서류 작업은 모든 사람들의 골칫거리였다. 점진적으로, 1995년에 이르렀을 때 몇몇 전공에서 ERAS를 사용했고, 학생들은 지원서를 작성한 다음, 디스켓에 담아, 학장실로 가서 전송하곤 했다.

 

21. 세 번째는 전공의 지원 시장(market)의 변화였다. 1992년은 지원자보다 전공의 자리가 더 많은 마지막 해였다. 이후로는 늘 지원자 수가 전공의 자리보다 많아서, 전공의 정원은 1명의 지원자 당 0.75~0.80명 정도의 범위에서 유지되어오고 있다. 

 

22. 이 세가지 변화는 각각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큰 영향이 없었을지 모르지만, 이 세가지가 모이자 ‘과열된 경쟁적 전공의 지원(application fever)’이라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