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 한 의예과 1학년 학생에게 F를 주었다. 당황한 학생은 나와 다른 교수님들께 성적을 문의하고, 어떻게 F를 면할 방법이 없는지 제법 여러 차례 연락해왔다. 의예과 1학년의 F가 흔하지 않기에, 의예과장님, 학생의 지도교수님, 학생을 안타깝게 여긴 다른 수업참여교수님 등등 여러 분으로부터의 연락도 받았다. (물론 그대로 F가 나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학생은 "특시"라는 한양대에 있는 시스템을 통해 부활(?)의 기회를 얻었다. 특시는 평균평점이 2.0 이상이면서, 한 과목에서만 F인 경우에 부여되는 재시 기회이다. 학생에게 특시 과제로 이번 1학년을 돌아보는 글을 써오라고 하고, 이 내용을 가지고 한 시간 정도 상담을 했다.
상담 말미에 학생은 "이렇게 시간을 많이 뺏고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하다"고 했다. 그래서 이렇게 답했다.
"지금은 죄송하다고 말하기에 너무 이른 때인 것 같아요. 성적이의신청이나 문의에 대한 답변은 대표교강사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제가 OO학생에게 F를 부여한 결과로 OO학생 뿐만 아니라 많은 교수님들과 여러 통의 이메일과 전화, 문자를 주고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저는 그냥 제가 해야 할 일을 한 거에요. 그래서 이걸 가지고 그렇게 죄송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정말 죄송해야 하는 때가 온다면 그건 아마 내년 이맘때일 겁니다. 제가 드린 과제를 하면서 지난 1년을 돌아보고, 남은 의예과 1년에 대한 계획과 다짐을 세웠음에도, 1년이 지나고 보니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때 저에게 죄송해해도 돼요. 그 전까지는 전혀, 괜찮습니다.
제 전공의 특성상, 아무리 사람이 타고난게 있다고 해도, 저는 학습을 통한 변화와 개선, 발전과 향상의 가능성을 믿는 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F를 부여한 뒤의 일련의 과정과 오늘의 상담이 저에게는 단순히 '학생 한 명에게 F를 주느냐 마느냐의 판단과정'이 아니라, OO학생과 거쳐가는 "교육적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이 모든 시간에도 불구하고 1년 뒤에 OO학생이 지금과 달라진게 없다면, 그게 저에게는 가장 아쉬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죄송하다는 말은 그때까지 미뤄두셔도 됩니다. 남은 의예과 1년을 잘 보내시길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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