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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병원과 현대 기술의 통합

Meded. 2024. 9. 10. 02:50

출처: Foucault, M., Knowlton, E., King, W. J., & Elden, S. (2016). The incorporation of the hospital into modern technology. In Space, knowledge and power (pp. 141-151). Routledge.

https://www.taylorfrancis.com/chapters/edit/10.4324/9781315610146-21/incorporation-hospital-modern-technology-michel-foucault-edgar-knowlton-william-king-stuart-elden

 

 

병원이 현대 기술에 통합된 과정

 

미셸 푸코 (번역: 에드가 놀턴 주니어, 윌리엄 J. 킹, 스튜어트 엘든)

 

병원이 치료의 도구, 즉 환자의 질병을 치료하거나 개입하는 도구로 여겨지게 된 것은 언제일까? 병원을 치료적인 도구로 간주하는 개념은 비교적 현대적인 것으로, 18세기 말에 등장한 개념이다. 1760년경 병원이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도구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나타났으며, 이는 병원에 대한 체계적이고 비교적인 조사의 새로운 관행으로 반영되었다.

 

유럽에서는 일련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그 중에는 1775년부터 1780년까지 영국인 존 하워드가 대륙의 병원, 감옥, 빈민원을 조사한 여행이 포함된다. 또한 프랑스에서는 아카데미 과학 연구소의 요청에 따라 자크 테논이 파리의 ‘Hotel Dieu’ 재건 문제를 조사하는 일이 있었다.

 

이러한 조사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1. 병원 개혁 또는 재건을 위한 프로그램 정의
    이 조사의 목적은 병원에 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병원 개혁 또는 재건을 위한 프로그램을 정의하는 데 있었다. 프랑스에서 아카데미 과학 연구소가 테논을 유럽의 여러 나라로 보내 병원 상황을 조사하도록 했을 때, 그는 중요한 진술을 남겼다: "현재 존재하는 병원들만이 새 병원의 장단점을 판단할 수 있게 한다." 이는 어떤 의학 이론도 병원 프로그램을 정의하는 데 충분하지 않으며, 추상적인 건축 계획도 좋은 병원을 위한 공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2. 병원은 복잡한 문제로, 그 효과와 결과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병원은 질병에 영향을 미치며, 이를 악화시키거나 증식시키거나 반대로 완화시킬 수 있다. 새로운 병원을 실질적으로 조사하는 것만이 새로운 병원 건축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병원은 더 이상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며, 기후나 질병 등을 연구하듯이 연구해야 하는 새로운 의료-병원 복합체의 일부로 통합된다.
  3. 기능적인 병원 조사
    이 사실조사는 병원의 외부적 모습이나 건물의 일반적인 구조에 대한 세부사항을 거의 다루지 않았다. 더 이상 17세기와 18세기의 고전 여행가들이 만들었던 기념물에 대한 묘사처럼 단순한 기술이 아닌, 기능적인 기술이었다. 하워드와 테논은 병원당 환자의 수, 침대의 수, 병원의 유용한 공간, 방의 길이와 높이, 각 환자가 사용하는 공기의 부피, 그리고 사망률과 치료율을 조사했다.
  4. 병원 환경과 병리 현상 간의 관계 조사
    또한 그들은 각 병원의 위생 상태와 병리 현상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려고 했다. 예를 들어, 테논은 상처를 입은 환자들이 어떤 특별한 조건에서 더 잘 회복되었는지, 그리고 가장 위험한 상황이 무엇인지 조사했다. 그는 상처를 입은 환자들의 사망률이 '악성 열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과 가까울수록 높아진다는 상관관계를 발견했다. 또한, 상처를 입은 환자들의 방 위층에 출산 중인 환자들이 위치하면 사망률이 증가한다는 사실도 설명했다. 따라서 상처를 입은 환자들은 출산 중인 환자들이 있는 방 아래에 배치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론지었다.
  5. 병원 내부 이동 경로 조사
    테논은 병원 내에서 깨끗한 침대 시트, 더러운 천 등 상처 치료에 사용된 물품들이 위치한 방과 이들의 이동 경로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그는 이 물품들이 누가 운반하고 어디에서 세탁되고 분배되는지를 조사했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이러한 경로가 병원 내부의 여러 병리 현상을 설명해 줄 수 있었다.
  6. 병원의 구조와 분포가 치료 결과에 미치는 영향 분석
    테논은 또한 당시 가장 자주 시행된 수술 중 하나인 개두술(두개골을 절개하는 수술)이 왜 영국 베들레헴 병원에서 파리의 Hotel Dieu보다 더 좋은 결과를 보였는지에 대해 분석했다. 병원 구조와 환자 배치의 내부적 요소가 이러한 차이를 설명할 수 있을까? 그는 방의 위치, 환기 상태, 더러운 천의 이동이 이러한 문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이 논문은 18세기 말부터 병원이 단순한 수용 시설이 아닌, 환자의 질병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중요한 치료 도구로 변화하는 과정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병원의 구조적, 기능적 측면과 병리학적 현상 간의 상호작용을 심도 있게 분석하면서, 병원의 환경과 치료 결과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하고 있다.

 

병원의 의료 공간 조직에 대한 기능적 묘사의 저자들

 

이 기능적 묘사를 작성한 저자들은 건축가가 아니었다. 테논은 의사였으며, 아카데미 과학 연구소가 그에게 병원을 방문하라고 지시한 것도 의사로서였다. 하워드는 의사는 아니었지만, 자선가들의 선구자였으며, 거의 사회의료적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따라서 병원을 치료의 기제로 보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병리적 영향을 교정해야 한다는 새로운 관점이 등장했다. 병원이 환자를 치료하는 목적으로 존재해온 지 수천 년이 되었으니, 이것이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17세기에 병원이 충분히 치료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고, 병원을 치료 도구로서 보다 정교하게 다듬는 문제일 뿐이라는 가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가설에 대해 일련의 반박을 제기하고 싶다. 중세 이후 유럽에서 운영된 병원은 결코 치료의 수단으로 기능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구상된 적도 없었다.

 

서구에서 환자 돌봄의 역사에는 서로 겹치지 않는 두 가지 범주가 있었다. 이 범주는 때로는 결합되기도 했으나 근본적으로 달랐다: 의학과 병원이다. 중세 이후 서구 도시 생활에서 중요한, 심지어 필수적인 기관으로 자리 잡은 병원은 의료 기관이 아니었다. 이 시기의 의학은 병원 직업이 아니었다. 18세기 병원-의학, 즉 의료-치료 병원이 도입된 혁신을 이해하려면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나는 이 두 범주 간의 차이를 보여줌으로써 이 혁신이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 설명하려고 한다.

 

18세기 이전의 병원은 본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기관이었다. 동시에 분리와 배제의 기관이었다. 가난한 사람은 도움을 필요로 했고, 환자로서 질병을 옮길 위험이 있어 위험한 존재였다. 따라서 그를 격리하고 그가 초래할 수 있는 위험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병원의 존재가 필요했다. 18세기까지 병원의 이상적인 인물은 치료를 받기 위해 온 환자가 아니라, 죽음에 이르기 직전의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는 물질적 도움과 영적 도움을 받아야 했으며, 최종적인 돌봄과 종교 의식을 받아야 했다. 이것이 병원의 본질적 기능이었다.

 

당시에는 "병원은 사람이 죽으러 가는 곳"이라고 말하곤 했고, 그 말은 이유가 있었다. 병원의 직원들은 환자를 치료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구하려고 했다. 이 직원들은 종교인이나 평신도들로 구성된 자선 직원들이었으며, 그들의 자비로운 행위는 환자의 영원한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결과적으로 병원은 죽음의 순간에 가난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고, 그를 돌보는 직원들의 영혼도 구원하는 역할을 했다. 병원은 생에서 죽음으로의 전환, 즉 물질적 구원보다 영적 구원을 위한 기능을 수행했으며, 이는 위험한 개인을 격리하여 대중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기능이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병원의 전반적인 의미를 연구하려면, Hotel Dieu의 관리자였던 한 의원이 쓴 "활동적 삶의 책(The Book of Active Life of the Hotel Dieu)"이라는 텍스트를 참고해야 한다. 이 텍스트는 비유로 가득한 언어로 작성된 일종의 "장미의 이름" 같은 병원화에 대한 기록으로, 병원의 돌봄과 영적 변형 기능이 어떻게 혼합되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러한 특징은 18세기 초까지 병원의 본질적인 특징이었다. 일반 병원은 병자, 정신병자, 매춘부 등이 뒤섞여 수용되는 장소로, 여전히 17세기식 기관이었다. 이는 배제, 돌봄, 영적 변형의 다양한 도구였으며, 그곳에는 의료적 기능이 존재하지 않았다.

 

 

의료 실천과 병원화의 과정

 

의료 실천과 관련해서, 그동안 의료가 통합해온 요소들과 과학적 정당화로 작용한 요소들 중 그 어떤 것도 병원이 의료적 역할을 하도록 미리 정해져 있지 않았다. 중세 의학과 17세기 및 18세기의 의학은 철저히 개별주의적이었다. 여기서 개별주의란 의사의 관점에서, 의사가 의료 조합이 보증한 수련 과정을 거쳐 자신만의 상태를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이 수련 과정은 문헌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고, 때로는 비밀스럽게 전해지는 치료법을 포함했다.

 

이 시기 의사 훈련에는 병원에서의 경험이 포함되지 않았다. 의사로서의 권위는 그가 경험을 통해 습득하거나 통합한 것이 아니라, 전해진 치료법을 통해 부여되었다. 의사가 질병에 개입하는 것은 '위기(crisis)'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의사는 환자와 질병의 첫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를 관찰해 위기의 순간이 언제 나타날지 예측해야 했다. 위기는 환자와 질병이 서로 맞닥뜨리는 순간을 의미했으며, 의사는 이때 나타나는 징후를 통해 질병의 경과를 예측하고, 가능한 한 건강과 자연이 질병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왔다.

 

치료 과정에서 자연, 질병, 그리고 의사가 함께 작용했다. 이 싸움에서 의사는 예측자이자 중재자, 그리고 자연을 도와 질병과 싸우는 동맹의 역할을 했다. 이러한 형태의 전투는 오직 의사와 환자 간의 개별적 관계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병원에서 수집된 방대한 관찰 결과를 통해 질병의 일반적인 특성과 그 구체적인 요소들을 도출해내는 아이디어는 이 시기의 의료 실천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시기의 의료 실천에서는 병원 지식을 조직화할 수 있는 요소가 없었으며, 병원의 조직화 또한 의학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 결과, 18세기 중반까지 병원과 의학은 여전히 별개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는 어떻게 일어났을까? 즉, 병원이 어떻게 의료화되고 병원 의학이 성립되었을까?

 

이 변화의 주된 요인은 병원이 환자나 질병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병원의 부정적인 영향을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즉, 병원을 먼저 의료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병원이 초래하는 해로운 영향, 병원이 만들어낸 혼란을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혼란은 병원이라는 기관이 수용된 사람들에게 만들어낼 수 있는 질병과, 병원이 위치한 도시에서 전파될 수 있는 질병을 의미한다. 병원은 경제적, 사회적 혼란의 중심지였다.

 

병원의 의료화가 병원이 초래하는 혼란을 제거함으로써 이루어졌다는 가설은 17세기에 유럽에서 최초로 대규모 병원 조직이 해양 및 군사 병원에서 등장한 사실로 확인된다. 병원 개혁의 출발점은 민간 병원이 아닌 해양 병원이었고, 해양 병원은 경제적 혼란의 장소였다. 이곳을 통해 식민지에서 온 상품, 귀중품, 희귀 물질, 향신료 등이 거래되었다. 밀수꾼들은 병에 걸린 척하며 배에서 내리면 병원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세관의 경제적 통제를 피하면서 이 물건들을 배포할 수 있었다. 런던, 마르세유, 라로셸의 대형 병원들은 이처럼 막대한 물품 거래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에 대해 세무 당국이 강력히 항의했다.

 

따라서 17세기 등장한 병원 규제의 첫 번째 조항은 병원에 있는 선원, 의사, 약사들이 소지한 상자들을 검사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병원에서 상자를 검사하고 그 내용을 기록할 수 있었으며, 만약 밀수품으로 의심되는 물품이 발견되면 그 소유자는 처벌받았다. 이 규정에서 경제적 조사가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해양 및 군사 병원의 문제와 새로운 병원 재조직의 등장

 

해양 및 군사 병원에서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났다: 바로 검역(quarantine), 즉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에 의해 전파될 수 있는 전염병이다. 마르세유와 라로셸에 세워진 라자레토(lazarettos, 검역소)는 일종의 이상적인 병원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이 병원은 환자를 치료하는 도구로 구상된 것이 아니라, 병원이 경제적 및 의료적 혼란의 중심지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병원이었다.

 

군사 및 해양 병원이 병원 재조직의 출발점이 된 것은 중상주의(mercantilism)와 함께 경제적 규제가 강화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에 인간의 가치가 점점 더 중요해졌다. 개인의 훈련, 능력, 그리고 적성은 사회에 점점 더 큰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군대의 예시를 살펴보자. 17세기 중반까지는 군인을 모집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재정적인 수단만 있으면 충분했다. 유럽 전역에는 실직자, 방랑자, 불행한 자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어느 나라의 군대이든, 국적이나 종교에 상관없이 입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17세기 말부터 소총이 도입되면서 군대는 더 기술적이고 정교하며 비용이 많이 들게 되었다. 소총을 다루기 위해서는 훈련과 기동, 그리고 연습이 필요했다. 이렇게 하여 군인의 가치는 단순한 노동자의 가치보다 높아졌고, 군대의 비용은 각 나라의 예산 항목으로 전환되었다.

 

훈련된 군인은 죽어서는 안 되었다. 만약 군인이 죽어야 한다면 전투에서 군인으로서 죽어야 했고, 병 때문에 죽어서는 안 되었다. 17세기 군인의 사망률은 매우 높았다. 예를 들어, 비엔나를 떠나 이탈리아로 향한 오스트리아 군대는 전투장에 도착하기 전에 병사들 중 6분의 5를 잃었다. 질병, 전염병, 그리고 탈영으로 인한 손실은 흔한 현상이었다.

군대의 기술적 변화 이후, 군사 병원은 중요한 기술적, 군사적 문제로 부상했다.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1. 감시 필요성: 병사들이 훈련에 큰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그들이 탈영하지 않도록 군사 병원에서 감시해야 했다.
  2. 치료 필요성: 병사들이 질병으로 죽지 않도록 치료해야 했다.
  3. 병사들의 회복 후 재활 필요성: 회복한 병사들이 여전히 병을 핑계로 침대에 머물지 않도록 해야 했다.

이러한 요구로 인해 군사 병원 주변에서 행정적, 정치적 재조직과 새로운 권위의 통제가 이루어졌다. 해양 병원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으며, 해양 기술이 더 복잡해지면서 훈련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 사람들을 잃지 않기 위한 조치가 필요해졌다.

 

이러한 재조직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군사 및 해양 병원의 재조직은 의학 기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정치적 기술, 즉 훈육(discipline)이라는 개념에서 비롯되었다.

 

훈육은 권력을 행사하는 기술로, 17세기에 그 근본 원칙이 발전된 것이지 새로 발명된 것은 아니었다. 훈육은 역사 전반에 걸쳐 존재했으며, 예를 들어 중세나 고대에도 존재했다. 중세의 수도원은 훈육 체계가 중심에 있었던 권력의 장소였다. 스페인,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식민지에서 존재했던 노예제도와 대규모 노예 회사들도 훈육 체계의 모델이었다. 로마 군단에서도 비슷한 훈육의 예시를 찾을 수 있었다.

 

따라서 훈육 체계는 고대부터 존재했지만, 17세기와 18세기에 이르러 사람 관리 기술과 함께 새로운 방식으로 완성되었다. 우리는 17세기의 기술적 발명들, 즉 화학이나 금속 기술에 대해 자주 말하지만, 이 새로운 인간 통제 기술의 발명에 대해서는 잘 언급하지 않는다. 이 기술은 인간의 다수를 통제하고, 그의 생산성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며, 그의 노동과 활동을 개선할 수 있도록 하는 권력 시스템을 가능하게 했다. 17세기에 유럽 전역에서 읽기 쓰기 능력의 큰 발전이 나타났을 때, 군대, 학교, 대규모 공장에서 이러한 새로운 권력 기술이 등장했으며, 이는 17세기의 중요한 발명 중 하나였다.

 

17세기와 18세기의 군대와 학교의 예시를 통해 발생한 변화

 

이 시기의 군대와 학교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개인들의 공간적 배치에 대한 기술이다. 17세기의 군대에서는 개인들이 하나의 집합체를 이루어 밀집되어 있었다. 강하고 능력 있는 군인들은 전방에 배치되었고, 전투 기술이 부족하거나 겁이 많은, 도망가고 싶어 하는 병사들은 측면이나 중앙에 배치되었다. 군대의 힘은 이러한 인간 집단의 밀집된 효과에 뿌리를 두었다.

그러나 18세기에 접어들면서, 병사가 소총을 받는 순간부터는 개개인의 배치를 연구하고, 그들이 배치되어야 할 자리에 위치하도록 하여 그들의 효율성을 최대화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생겼다. 군사 훈육은 병사에게 자기 자리를 찾고 필요한 곳에 위치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같은 방식으로, 17세기의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교사는 한 명의 학생을 불러 몇 분 동안 가르친 후 다시 자리에 앉게 하고, 그다음 다른 학생에게 같은 방식으로 반복했다. 그러나 집단 교육은 모든 학생들을 대상으로 동시에 진행되었으며, 이는 교실 내 공간적 배치도 요구했다.

 

훈육은 무엇보다도 공간의 분석이다. 이는 공간을 통해 개인화하는 것으로, 개체를 개별화된 공간에 배치함으로써 분류와 결합을 가능하게 한다. 훈육은 행동의 결과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발전 과정을 통제한다.

 

17세기 작업장에서는 작업자나 장인이 일정 품질의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요구되었고, 생산 방식은 세대 간에 전해지는 방식에 의존했다. 통제는 생산 방식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병사에게는 전투 기술을 가르쳤으며, 적보다 강하게 싸우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18세기부터는 인간의 몸에 대한 새로운 기술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효율적이고 신속하며 적절하게 움직이는 방법을 결정하기 위해 행동이 관찰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작업장에서 유명하면서도 악명 높은 감독관이 등장했다. 그들의 역할은 작업이 끝났는지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더 빠르고 적절한 동작으로 작업을 할 수 있을지를 관찰하는 것이었다. 군대에서는 부사관이 등장했으며, 그와 함께 군사 훈련, 기동, 시간 단위로 동작을 세분화하는 훈련이 도입되었다.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승리를 보장받았던 보병 규율은 몸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일련의 메커니즘을 포함했다.

 

훈육권력의 기술이며, 이는 개개인을 끊임없이 감시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단순히 규칙을 지키는지 가끔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개인들이 계속해서 활동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들을 지속적으로 감시해야 하며, 그들을 끊임없이 감시하는 계층적 피라미드에 복종시켜야 한다. 군대에서는 계급 구조가 출현하며, 이는 지휘관에서 병사까지 끊임없이 연결된다. 또한, 검사, 점검, 행진 등의 시스템을 통해 개개인을 영구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방식이 형성된다.

 

훈육은 또한 지속적인 기록을 요구한다. 개인에 대한 주석, 사건과 관련된 기록, 훈육적 요소, 그리고 상위 계층에 정보를 전달하는 시스템을 통해 계층 구조 상단에서 어떠한 세부사항도 놓치지 않도록 한다.

 

고전적 체계에서 권력 행사는 혼란스럽고 총체적이며 비연속적이었다. 이는 가족, 도시, 교구 등 전체 단위로 통합된 집단에 대한 주권자의 권력 문제였으며, 개인에 대해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권력이 아니었다.

 

훈육의 개념과 병원의 의료화

 

훈육은 권력 체계가 개인을 개별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그 결과를 만들어내는 기술의 집합이다. 이는 개인화의 권력으로, 그 기본 도구는 검사에 있다. 검사는 지속적이고 분류적인 감시를 의미하며, 이를 통해 개인을 분배하고 평가하여 최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 검사를 통해 개인은 권력 행사에서 하나의 요소로 변환된다.

 

병원의 무질서한 공간에 훈육적 메커니즘이 도입됨으로써 병원의 의료화가 가능해졌다. 경제적 이유, 개인에게 부여된 가치, 그리고 전염병의 확산을 막으려는 욕구는 병원에 대한 훈육적 통제를 설명해 준다. 하지만 이러한 훈육이 의료적 성격을 띠게 되고, 의사에게 이 훈육적 권한이 부여된 이유는 의학적 지식의 변화 때문이다.

 

병원 의학의 형성은 두 가지 요인에 기인한다. 첫째, 병원 공간에 대한 훈육의 도입이고, 둘째는 그 시기의 의학 실천에서 일어나고 있던 변화이다.

 

18세기 인식론적 체계에서 질병의 이해에 있어서 위대한 모범은 식물학, 즉 칼 폰 린네의 분류 체계였다. 이는 질병을 자연 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의미했다. 식물에서처럼, 질병에서도 다양한 이 존재하며, 관찰 가능한 특성들과 진화 과정을 가지고 있었다. 질병은 자연이지만, 이는 환경이 개인에게 특정한 작용을 한 결과로 나타난다. 건강한 사람이 특정한 환경적 작용에 의해 질병의 매개체가 되며, 이 현상은 자연에 의해 제한된다. 물, 공기, 음식, 그리고 일반적인 생활 양식이 개인에게서 다양한 유형의 질병을 발달시키는 기초를 이룬다.

 

이러한 관점에서 치료더 이상 질병 자체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과 유기체가 만나는 지점, 즉 주변 환경에 대한 개입으로 전환되었다. 공기, 물, 온도, 식이 요법 등의 환경적 의학이 이 시기에 형성되기 시작했다. 질병이 자연 현상으로 이해되고, 이는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의료적 개입의 변화병원 공간에 훈육을 적용하는 두 가지 과정이 결합되어 의료 병원의 기원이 탄생했다. 서로 다른 기원을 가진 이 두 가지 현상은 병원 훈육에 맞춰 조정되었고, 이는 환자와 질병의 무질서한 세계를 감시하고 조사하며 훈육을 적용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또한, 환자를 둘러싼 환경의 조건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환자들은 개별화되고, 그들을 감시할 수 있는 공간에 배치되었으며, 그들이 마시는 공기, 환경의 온도, 물, 식이 요법 등을 조정할 수 있었다. 훈육의 도입으로 인해 병원의 전반적인 환경이 치료적 기능을 갖게 된 것이다.

 

병원의 훈육적 권력과 의료화에 대한 설명

 

푸코의 이론에 따르면, 병원이 훈육적 권력의 기술과 환경에 대한 의학적 개입에서 탄생했다는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병원이 가지는 몇 가지 특징을 이해할 수 있다.

  1. 병원의 위치와 내부 공간의 분배
    18세기 말 병원 문제는 근본적으로 공간의 문제였다. 첫째로, 병원이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있었다. 병원이 더 이상 도시의 어둡고 혼란스러운 곳에 위치해, 사람들이 죽음의 순간에 찾아오고 위험한 미아스마(유해한 공기), 오염된 물 등이 퍼지는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병원이 위치한 장소는 도시의 위생적 통제에 맞춰져야 했으며, 도시 공간의 전반적인 의학적 측면에서 병원의 위치가 결정되어야 했다.환자를 둘러싼 관리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야 했고, 그를 위해 온도를 조절하거나 공기를 한 명의 환자에게 집중시킬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집단 병동에서도 환자 각각의 침대를 분리하여 공기가 순환되지만 미아스마가 퍼지지 않도록 하는 장치가 연구되었다.
  2. 이러한 변화는 병원이 환자에 대한 개입 수단으로 작용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병원의 건축은 치료의 도구가 되어야 했고, 단순히 환자가 죽으러 가는 장소로 인식되던 병원은 이제 치료적 목적을 가지는 의료적 공간으로 변모했다. 병원의 건축은 이제 식이 요법이나 방혈과 같은 의료적 행동과 같은 범주에서 치료적 도구로 작용하게 되었고, 그 목적과 효과 모두에서 병원 공간이 의료화되었다. 이것이 18세기 말 병원의 변화 중 첫 번째 특징이다.
  3. 둘째로, 병원의 내부 공간도 특정 기준에 따라 분배되어야 했다. 환경적 개입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면, 환자 개개인에게 맞춰진 개별화된 작은 공간 환경이 필요했고, 이는 환자, 질병, 그리고 질병의 진화에 따라 조정될 수 있어야 했다. 이로 인해 환자의 생존을 위해 공간의 기능적 및 의료적 자율성이 필요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한 침대에 여러 명의 환자가 누워 있던 침대 기숙사 방식은 끝나고, 한 침대에 한 명의 환자만 누워야 한다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4. 병원 내부 권력 체계의 변화
    17세기 중반까지 병원의 권력은 종교인들에 의해 행사되었고, 세속적인 사람들은 드물었다. 그들은 병원의 일상 생활을 관리하고, 환자의 구원식사를 담당했다. 의사는 가장 심각한 환자를 돌보기 위해 불려왔으며, 이는 실제 치료보다 형식적인 보증과 같은 역할이었다. 의사의 방문은 매우 불규칙했고, 원칙적으로 하루에 한 번 이루어졌으며 수백 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했다. 또한, 의사는 행정적으로 종교인들에 의존했고, 때로는 종교인들이 의사를 해고할 수도 있었다.동시에 병원 내에서 의사의 존재는 더욱 확고해지고 강화되었다. 18세기 동안 의사의 방문 빈도는 점점 더 빠르게 증가했다. 예를 들어, 1680년 파리의 Hotel Dieu에서는 하루에 한 번 의사가 방문했으나, 18세기에는 밤에 중증 환자에게 추가 방문을 해야 한다는 규칙이 생기고, 방문은 두 시간씩 지속되어야 했으며, 1770년경에는 의사가 병원에 상주하며 언제든지 환자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규정이 생겼다.병원 내 권력 구조의 역전은 의사의 권력이 행사되는 병원 방문의 의식적 절차로 반영되었다. 이 의식은 의사가 주도하고, 병원 내 모든 계층, 즉 보조 의사, 학생, 간호사 등이 환자 침대 앞에서 의사를 따르는 종교적 행렬처럼 이루어졌다. 이러한 방문의 의식은 18세기 병원 규정에 명시되어 있으며, 각 사람이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지, 의사의 도착이 종을 울려 알리도록 하고, 간호사는 문 앞에서 노트북을 들고 의사를 따라 방에 들어가야 한다는 등의 규칙이 포함되어 있었다.
  5. 3. 병원의 기록 시스템과 의학 지식의 변화
  6. 이로써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병원 의사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되었다. 17세기까지 유명한 의사들은 병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주로 개인 상담을 통해 명성을 얻은 의사들이 많았다. 반면, 병원을 방문하던 의사들은 일반적으로 그다지 명망이 없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18세기 말에는 병원에서 경험이 많고 유능한 의사가 등장하게 되었으며, 테논(Tenon)이나 비세트르(Bicêtre)에서 필립 피넬(Philippe Pinel)이 이루어낸 성과는 모두 병원에서의 실천 덕분이었다.
  7. 병원이 치료의 도구로 구상되기 시작하고, 병원 공간의 분배가 치료적 수단이 되면서, 의사가 병원 조직에 대한 주요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의사는 병원의 건축과 조직화에 대한 자문을 맡게 되었고, 이 때문에 테논(Tenon)이 이전에 언급된 조사를 수행하게 되었다. 종교 공동체가 사용했던 수도원 형태의 병원 조직은 법적으로 금지되었고, 음식, 환기의 빈도, 음료 제공의 빈도 등이 치료의 도구로 간주되면서, 의사는 환자의 식이 요법을 통제하게 되어 병원의 경제적 운영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이는 이전까지는 종교 단체의 특권이었다.

병원의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영구적이고 가능한 한 완전한 기록 시스템의 조직이다. 이 기록 시스템은 병원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등록하고 기록한다. 먼저, 환자의 식별 방법이 도입되었다. 환자의 손목에 작은 라벨을 묶어 그가 살아있거나 사망했을 때 구분할 수 있게 하였으며, 침대 머리에는 환자의 이름과 병명을 적은 카드가 놓였다. 또한, 다양한 기록 시스템이 도입되었으며, 이는 정보를 수집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환자의 이름, 의사가 진단한 병명, 입원한 병동, 환자가 퇴원했는지 사망했는지 등을 적는 입·퇴원 기록부가 있었고, 각 병실의 책임 간호사가 작성한 병실 기록부, 약사가 처방전을 기록하는 약국 기록부도 있었다. 또한, 의사가 회진 중에 내린 처방, 치료 내용, 진단 결과 등을 기록한 문서들도 있었다.

 

1785년 파리의 Hotel Dieu에서 시행된 규정에 따르면, 의사는 최소한 한 달에 한 번 자신의 실험과 기록을 검토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과정에서 각기 다른 치료 방법을 비교하여 어떤 방법이 가장 효과적인지, 어느 의사가 가장 성공적인 치료를 했는지, 혹은 전염병이 방에서 방으로 퍼지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이렇게 병원 내부에는 문서의 집합체가 형성되었으며, 병원은 단순히 치료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기록과 지식 획득의 장소가 되었다.

 

18세기 이전까지 의학 지식은 주로 에 담겨 있었으며, 이는 고전적인 의학 교과서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의학 지식은 텍스트에만 머물지 않고, 병원에서 매일 발생하는 실시간 기록과 실제 행동 속에서 이루어졌다. 병원은 더 이상 단순한 치료의 장소가 아닌, 의료 교육지식의 전파가 이루어지는 임상 클리닉이 되었다. 클리닉이라는 용어는 병원이 의료 지식을 형성하고 전파하는 장소로 조직된 것을 의미한다.

 

또한 병원 공간에 훈육이 도입되면서, 병원은 치료뿐만 아니라 기록, 지식의 축적을 가능하게 했다. 의학은 개인전체 인구를 관찰하고 연구하는 광대한 분야를 제공했다. 훈육된 병원 공간 덕분에 개별 환자를 격리하고, 그를 침대에 배치하며, 식이 요법을 처방하는 등의 개별화된 의학이 가능해졌다. 환자는 관찰, 감시, 치료의 대상이 되었고, 그 결과 의료 지식과 실천객체로 등장했다.

 

동시에, 같은 훈육된 병원 시스템 덕분에 많은 수의 개인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일일 기록은 병원 간, 다양한 지역 간 비교가 가능해졌고, 이를 통해 인구 전체에 공통된 병리적 현상을 연구할 수 있었다. 이러한 병원 기술 덕분에 개인인구 전체가 동시에 지식의료 개입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18세기 동안 형성된 의학은 개인인구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의학이었다. 19세기에 이르러 이러한 두 가지 의학의 재분배가 나타나게 되었고, 이는 의학이 개인과 인구 전체를 아우르며 발전한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