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학생을 가르칩니다.

교수자로서의 나, 그리고 나의 과목 (2020년 12월 31일의 기록)

Meded. 2021. 12. 31. 05:44

1. 내년이면 의과대학에서 교수라고 일한 것이 4년째고, 의학교육을 시작한 것은 9년째가 된다. 여전히 부족하고 모르는 것 천지인데, 옆에서 보면,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 더 이상 뭘 ‘모른다’고 하기엔 너무나 많은 시간이 지났다.

 

2. 지난 3년간 맡았던 과목을 정리해봤다. 정리하면서 새삼 느꼈는데, 확실히 학생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다. 물론 명확한 목표와 근거는 있지만, 그것을 온전히 소통한다는 것은 어려운, 아니 사실상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던 듯 하다. 

 

3. 학생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에서 파생되는 가장 큰 문제점은 당연히 많은 과제에 대한 부담이다. 이 부담은 학생의 부담 외에도, 나 자신의 부담, 과목에 함께 참여해주시는 다른 교수님들에게 가해지는 부담, 심지어 과목 운영을 도와주는 조교선생님의 부담을 모두 포괄한다. 학생의 불만, 지속가능한 과목 운영, 내가 느끼는 스트레스 등은 대체로 이 ‘부담’에 수반되는 이차적인 문제이다.  

 

4. 이렇게 ‘부담스러운’ 과목을 하고 있었던 것은 교수경험 초짜가 뭣 모르고 열정만 넘친 탓이었으며, 공부했던 ‘이론’을 가능하다면 ‘현실’에 구현해야 한다는 강박도 문제였다. 의학교육을 전공했다면 적어도 내가 책임진 영역에서는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교수법’을 이야기할 때, 정작 내 과목은 대충하면서 남에게만 높은 기준을 요구하는 언행불일치로 보이기 싫었던 것이 한 이유다. 내가 내 과목을 제대로 해야 다른 사람에게 할 말이 있다고 생각했다. 

 

5.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진짜 근원적인 문제는 모르는 분야에 대한 강의를 하는 것을 극도로 회피하고 싶어하는 나 자신의 성향이었다. 이런 성향이 누구나 어느 정도는 비슷할텐데, 내가 유난히 더 그런 편인가라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의과대학의 현실에서는 내 전공분야만 강의할 수 있지 않았고, 웬만하면 피하려 해봐도 이미 개설된 과목의 책임을 맡을 수 밖에 없는 상황도 생겼다. 의학개론, 의사학, 환자-의사-사회1이 그랬다. 

 

6. 모르는 분야에 대한 과목을 맡는 경우 몇 가지 전략이 선택가능하다.

첫째, 어찌되든 직접 공부해서 가르친다.

둘째, 부담과 책임을 나누고자 여러 교수님들의 도움을 십시일반으로 구해본다.

셋째, 내용 공부는 학생의 몫으로 남기고,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데 집중한다. 

 

7. 불행히도, 나는 5에서 언급한 세 과목 모두에서 세 번째 전략을 선택했다. 첫 번째 선택지에 대해서는, 내가 직접 공부해서 가르치는 것은 아무리 공부한다 해도, 나 스스로 내 실력이 ‘남을 가르칠 정도’에 미칠 것 같지 않았다. 두 번째 선택지에 대해서는, (조금 핑계이지만) 신임교수이자, 주니어로서 선배교수들께 과목 참여를 요구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나도 하기 싫은 것을 남한테 부탁하는 것이 참 내키지 않았다. 부탁 같은 것을 잘 못하는 성격도 거들었다. 

 

8. 그리하여 울며 겨자먹기로, 혹은 나름대로는 차선으로, 세 번째 전략을 고르게 되었다. 어쩌면, 잘 만 된다면, “내용 전문성”이 결여된 상태지만, “교수법과 교수 전략”을 최적화하면 돌파구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교수의 역할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어차피 내가 그 분야 전문가도 아니어서 ‘제대로’ 가르치기는 어려우니까. ‘적당히’ 가르치는 정도라면, 학생이 스스로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2, 3번의 문제, 즉 책임교수, 학생, 참여교수 (그리고 가끔은 조교까지)의 부담으로 연결되고 만다. 

 

9. 몇 달 뒤면 새로운 학기가 시작하고, 나는 또 다시 (작년까지는 다른 교수님이 맡아 하셨던) 의예과 1학년의 과목을 맡게 될 예정이다. 고민스럽다. 또 다시 내가 잘 모르는 내용을, ‘교수법’이라는 미명 아래 요령만 부려가며 진행하는 일은 피하고 싶다. 그런데 내가 잘 아는 내용, 그러니까 ‘의학교육’이란 것을 가르친다면, 이것이 의과대학생들에게, 의예과 학생들에게 필요한건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는 필요하다는 확신이 있는데, 그것이 학생, 학교, 다른 교수에게도 납득이 될지가 확신이 없다.

 

===과거에 했던 과목들===

(1) 좋은의사되기(2018, 2019)
▣ 대상: 의예과 1학년
▣ 내용: 다양함(성격, 편견, 공감, 의사소통, 학습, 피드백, SNS활용, 회복탄력성, 문화 등)
▣ 교재: 없음
▣ 교수법: 매주 강의(1h)+조별활동(1h)
▣ 평가법: 조별활동평가(35%)+동료평가(15%)+자기보고식설문(10%)+성찰에세이(40%)
▣ 특이사항: 조별활동과 동료평가는 매 주 진행, 성찰에세이는 최소 4회, 자기보고식설문은 제출여부만 평가

 

(2) Critical Thinking(2018, 2019)
▣ 대상: 의예과 2학년
▣ 내용: 비판적 사고 함양을 목표로 하나, 정해진 내용은 없음.
▣ 교재: 5인의 참여교수가 각각 선정한 책 5권
▣ 교수법: 소그룹 독서토론 (총 5회)
▣ 평가법: 토론교수평가(30%)+에세이교수평가(30%)+출석(30%)+동료평가(10%)
▣ 특이사항: 네 개의 평가요소가 각 토론마다 평가됨

 

(3) 의학개론(2019)
▣ 대상: 의예과 2학년
▣ 내용: 질병/건강/치유, 역사/철학/윤리, 교수/학습, 개인/환자/권리, 제도/공중보건, 한의학/미래의학 등
▣ 교재: 의학개론(을지대학교 의과대학 편찬위원회 편)
▣ 교수법: 별도 강의 없음, PechaKucha 형식의 발표(매주 8명)
▣ 평가법: 해당 주에 발표된 내용에 대한 시험
▣ 특이사항: 매 주 보는 시험은 한 조(5인) 내에서 무작위 2인 선발. 다른 세 명의 조원은 이렇게 뽑힌 두 명 조원의 점수를 받게 됨

 

(4) 의사학(2018)
▣ 대상: 의학과 1학년
▣ 내용: 의학의 역사
▣ 교재: 의학의 역사(재컬린 더핀 지음, 신좌섭 옮김)
▣ 교수법: 별도 강의 없음, World Café를 응용한 피어티칭
▣ 평가법: 출석(5%)+동료평가(15%)+문항개발(15%)+중간고사(30%)+에세이(35%)
▣ 특이사항: 중간고사는 각 조에서 출제한 주관식 단답형 문항 중 선정

 

(5) 환자-의사-사회1(2020)
▣ 대상: 의학과 1학년
▣ 내용: 전문직업성(※ 의료인문학은 타 교수 진행)
▣ 교재: Healthcare Professionalism (John Wiley & Sons)
▣ 교수법: 강의(전반부)+조별 프로젝트(후반부)
▣ 평가법: 중간고사 보고서(10)+조별진행보고서(30)+조별최종결과물(10)+동료평가(10)+성찰보고서(10)
▣ 특이사항: 후반부 수업은 Zoom 기반 피드백으로 운영, 각 보고서의 요구 분량은 400단어~1500단어(과제별로 상이)